1962년 <이반의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며 촬영했던 1986년 <희생>까지, 24년 동안 단 일곱 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단 한 편의 실패작도 없었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다시 찾아온다. 그의 유작 <희생>이 국내 첫 개봉 후 10년 만에 <노스텔지아>와 함께 우리를 다시 만나기 위해 외출을 시도한다.
타르코프스키가 남긴 7편의 장편
1962년 <이반의 어린 시절>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1966년 <안드레이 루블로프>|1969년 칸국제영화제 국제 영화비평가상|1972년 <솔라리스>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1974년 <거울>|1979년 <스토커> 칸국제영화제 경이의 부문 대상|이탈리아 망명|1983년 <노스텔지아> 칸국제영화제 창조대상, 최우수 감독상, 국제 영화비평가상, 스웨덴으로 망명|1986년 <희생>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국제 영화비평가상, 기술상, 예술특별공헌상
<제7의 봉인> <산딸기> <화니와 알렉산더>의 잉마르 베르히만 감독은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만약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타르코프스키 같은 위대한 영상시인이 있기 때문이고, 타르코프스키야말로 영화라는 매체에 적합한, 고유한 영상 언어를 창조한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이라고 말했다. ‘금세기 최고의 감독’ ‘영화사의 기적’ ‘위대한 영상시인’이라 불렸던 타르코프스키는 우리나라에선 1990년대 초중반 예술영화 열풍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들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롱테이크와 뭔가 묵직한 것을 말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정체를 뚜렷하게 이해하기엔 난해하다는 특성을 지녔기에 소위 ‘어려운 영화’ ‘잠이 오는 영화’의 대명사로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세 번 반복해서 보다 보면 그 어느 영화도 주지 못하는 감동의 실체와 만나게 되는데, 아마도 10여 년 전 그의 영화에 그토록 많은 영화 마니아들이 열광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만나게 되는 <노스텔지아>와 <희생>은 예전에 이미 극장에서 봤던 관객들에겐 10년이 지나서도 그의 영화가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울림을 주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고, 미처 타르코프스키와 만나지 못했던 관객이라면 새로운 영화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다. 혹시, 타르코프스키라는 이름에 눌려 그와의 만남을 지레 포기할지도 모를 이들을 위해 좀더 쉽고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몇 가지 사전 정보를 제공한다.
러시아, 가족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점은, 그는 러시아를, 러시아 민중을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러시아를 토대로, 러시아의 민중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가 <이반의 어린 시절>과 <안드레이 루블로프> 이래로 소련의 예술 정책과 맞지 않는 영화를 연출한다고 하여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영화 작업을 계속했던 것도 러시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스토커>가 칸국제영화제에 진출했을 때,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소개로 제작자 주세페 란치를 만나 다음 작품인 <노스텔지아>를 이탈리아에서 준비하게 된다.
또한 1984년 7월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망명 선언을 했으며, 소련으로부터 입국을 금지 당한다. 그가 간암으로 투병 생활을 할 당시 가장 간절했던 소원은 소련에 있는 아들 안드류슈카를 만나는 것이었다. 결국 온갖 노력 끝에 아들과 이탈리아에서 만나게 되고, <희생>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을 때 안드류슈카는 대리 수상을 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1932년 4월 4일 볼가강 유역의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났다. 당시 소련의 시인이었던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와 인쇄소에서 교정을 맡아본 마리아 이바노브나 타르코프스카야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그가 네 살 되던 해에 별거에 들어가 아버지와의 단절을 경험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영화 속에서 계속된다.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고, <안드레이 루블로프>에서 종 만드는 소년 보리스카는 죽은 아버지에게서 종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고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없다. <솔라리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켈빈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인물은 아버지이다.
그렇다고 그가 ‘아버지’와 온전한 화해를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은 절대 자전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하는 <거울>에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실제 아버지의 자작시를 낭송한다. <노스텔지아>에서도 주인공을 통해 잠시 아버지의 시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전혀 다르다. 그의 영화 속에서 어머니는 항상 고향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게다가 <거울>에서는 실제 어머니가 출연하기도 한다.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만든 <노스텔지아>에서 러시아의 작가 안드레이 고르차코프는 그가 연구하려 했던, 18세기 러시아에서 이탈리아로 유학 온 작곡가 파벨 소스노프스키처럼 향수병을 앓는다. 물론 타르코프스키가 앓았던 향수병도 이에 못지 않았으며, <노스텔지아>는 어머니에게 헌정된다. 그는 1986년 12월 29일, 54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변혁 감독의 <인터뷰>에서 잠깐 나오듯 프랑스의 러시아 망명자들을 위한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물과 불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는 유난히 물의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안개나 비가 많으며, 그의 영화들은 항상 축축하게 젖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자브라이예를 생각하며 비가 자주 왔다는 것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한 들판이나 강, 나무, 비 등은 바로 고향 마을의 모습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노스텔지아>나 <희생>에서 물과 불은 아주 색다르게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물이 생성을 뜻한다면, 불은 소멸을 뜻한다. 하지만 이 두 작품에서 불은 정화 혹은 희생을 의미한다.
<노스텔지아>에서 고르차코프가 온천지역에서 만나는 도메니코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동상에서 분신자살을 한다. <희생>에서 알렉산더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다. 불은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물은 생성을 뜻한다. <노스텔지아>에서 처음 보이는 온천장은 물이 가득하다. 하지만 고르차코프가 도메니코의 분신과 때맞춰 온천장을 가로지를 때의 그곳은 거의 메말라 있다.
즉 물이 없는, 생성 없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도메니코와 고르차코프는 희생하는 것이다. 마찬 가지로 <희생>에서는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 알렉산더가 병원으로 옮겨진 후, 막내 아들 고센은 죽은 나무에 양동이로 물을 준다. 그리고 마치 나무는 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물과 불은 이렇게 순환하며, 세상을 정화시키고 생성시키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 그가 영화를 연출하면서 가장 많은 편집을 했던 영화는 <거울>이다. 그는 이 영화를 열아홉 번 편집을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열아홉 번이 부분적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편집이었다는 것이다. <거울>은 각 인물들의 주관적인 시간 속에서 기억과 현실이 얽힌다. 실제로 타르코프스키는 “어떤 영화가 나올지 모르겠다”고 했으며, “<거울>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봐달라”고 했다. 아마 그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평론가들은 <거울> 속에 내재해 있는 갖가지 의미들을 찾으려 했고, 감독도 모르는 단서들을 들이댔다. 하지만 그는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을 따랐을 뿐이다.
<거울>에서 그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바로 그렇게 과거를 추억하고, 주변 인물들과 소통한 것이다. 질 들뢰즈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마음의 영화’라고 한 것도 다 이런 이유다. <솔라리스>를 보자. 신비의 혹성 솔라리스엔 기억 속에 묻힌 인물을 형상화시키는 바다가 있다. 그리고 이 현상을 수사하기 위해 켈빈이 도착하자 7년 전에 죽은 아내가 나타난다. 켈빈은 아내를 없애지만 또 다시 나타난다. 아내를 기억 속에서 지울 수는 없고, 켈빈은 아내를 인정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이번엔 아내가 자신은 아내가 아니라며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자살한다. 실은 켈빈의 아내는 그 때문에 7년 전에 자살했던 것이다.
켈빈은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켈빈은 잊으려 했던 그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영화를 지켜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의식의 흐름을 발견한다. 인물들의 의식과 행동을 보여줄 때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호흡을 끊지 않는다. 그래야만 그 안에 진정성이 담긴다고 본 것이다.
<노스텔지아>에서 고르차코프가 촛불을 들고 온천장을 오가는 모습을 그토록 오래도록 보여준 이유가 있다. <스토커>는 행위와 시공간의 통일성을 위해 마치 하나의 숏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그가 창조하는 모든 숏은 의미성과 연관성을 갖는다. 그는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는 숏은 한 커트도 찍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진에서 보듯 54세의 나이에 저렇게 늙어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원 기자
그의 영화에 얽힌 에피소드들
데뷔작 <이반의 어린 시절>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자 타르코프스키는 소련과 서방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소련에서는 정부의 정책 선전과 상관없다는 것이었고, 서방에서는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에 장 폴 샤르트르는 이 영화를 사회주의적 초현실주의라 불렀다. 아마 ‘이념을 뛰어넘는 무엇’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5세기 성상 화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다룬 <안드레이 루블로프>는 1966년에 완성됐지만 1969년 뒤늦게 앙드레 말로의 요청에 의해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그리고 소련에서는 1971년에서야 개봉되었다.
SF 영화 <솔라리스>를 1970년에 있었던 일본 EXPO기간 중에 촬영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 정부의 허가가 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는 이 영화를 가장 싫어했다. 그 이유는 제대로 밝힌 바 없다.
1977년에 촬영이 시작된 <스토커>는 1년 만에 촬영을 끝냈지만 현상소에 불이 나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촬영을 해야만 했다. 재촬영하면서 영화도 재구성 됐다.
<희생>에서 알렉산더가 집을 불 지르는 장면은 두 번 촬영된 것이다. 첫 번째 촬영 때에 필름이 엉키는 바람에 제대로 찍히지 않았는데, 타르코프스키는 곧바로 집을 다시 짓기로 했고, 스태프들은 며칠 만에 집을 완성해냈다. 두 번째 촬영 때엔 두 대의 카메라가 동원됐다. 당시 촬영감독은 잉마르 베르히만과 호흡을 맞추던 명촬영 감독 스벤 닉비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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