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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하루/영화와만남

영혼을 구원하는 예술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벌써 10년이 지났다. 말하자면 이건 20세기의 이야기.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지만 그때 ‘예술 영화’ 붐이 일었다. 사실 영어에는 예술 영화라는 말이 없다.
‘아트 필름(Art Film)’ 이라는 말은 ‘콩글리시’ 인 것이다.
그 대신 ‘예술 영화관 영화(Art Theater Movie)’ 라는 말을 쓴다.


예술 영화관은 있지만 예술 영화는 없었다. 막 군사 독재 정권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정치는 혼란스럽고, 국회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거품 경기가 살아나고 있었고, 거리의 페퍼 포크와 전경들도 모습을 감추었다. 정치적인 담론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문화가 채워갈 때 문학 대신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얼터너티브 록이 민중 가요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권총 자살한 커트 코베인이 마지막에 부른 ‘용서하세요(Apologize me)’는 간청이 되었다.

새로운 세대들은 밤새 채팅으로 시간을 죽였으며, 거기서 새로운 친구들을 기다렸다. 그들의 이드(Id)는 바로 아이디(id)였다. 온라인 게임과 채팅은 1990년대 초 신세대의 암호였다.
바로 그때 영화관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도착했다. 사실 도착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1980년대 후반부터 불법비디오로 떠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문에 소문을 거쳐 영화과 학생들이 돌려보기 시작하던 것을 문인들이 구해서 보기 시작했고, 극단적인 두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그 하나는 죽여주게 지루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라는 평이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한 장면을 편집하지 않고 장(長)시간 동안 찍는 롱 테이크는 악명이 높다.

이를테면 이번에 국내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는 <노스탤지아>에서 주인공은 촛불을 들고 온천장을 가로질러 무려 13분 20초 동안을 그저 걷기만 한다. 우스갯소리로 ‘보다 지쳐 잠깐 졸았는데 아직도 그 촛불을 들고 걸어가더라’ 는 푸념도 있다. <희생>의 첫 장면 또한 14분 50초 동안이나 계속된다. 만일 두 가지 소문 중 하나만 돌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이 이례적으로 이 감독에 대한 글을 썼다


<노스탤지아>에 대한 것이었다. 문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 예술적인 심미안과 까탈스러운 안목으로 소문난 김현이 그렇게 맹목적인 지지를 보낼 때는 도대체 어떤 수준의 영화인지 궁금하다고 구해보았다는 문인을 만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소문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이제는 거의 사라진 통신(그때는 아직 인터넷이 없었다) 채팅 룸의 영퀴방(영화 퀴즈방) 덕분이었다.
여기서 타르코프스키는 <블루>,<화이트>,<레드>를 만든 폴란드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포트스카와 함께 ‘골치 아픈 스키 형제’ 로 불리기도 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동경대 총장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소문난 영화광이기도 한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을 빌리면, ‘20 세기 사회주의를 살다 간 19세기 교양인’ 이었다. 타르코프스키는 1932년 4월 4일 (아직 사회주의였던) 소비에트 시절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났다. 지질학을 공부했지만, 해저를 탐사하던 중 ‘물 속에서 움직이는 사물의 흔들림’에 매혹되어 그 일을 그만두고 모스크바 영화 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재능은 이미 첫번째 영화에서 나타나 데뷔작 <이반의 소년시절>은 1962년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되어 장 폴 사르트르가 심사위원장 이었던 그 해 대상인 황금사자 상을 받았다. 이 결과에 대해 이탈리아 소설가인 좌파 성향의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비판적인 글을 썼지만, 사르트르는 그에 대해 ‘사회주의적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옹호했다. 그러나 수상이 타르코프스키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다음 영화 <안드레이 루블례브>는 소비에트 내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공산당 영화분과 위원장인 세르게이 본다르츄크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가리켜 부르주아적 취향으로 가득 찬 낡은 인텔리겐챠 영화로 소비에트 영화에 매우 위험한 경향이라고 평했다.

영화는 공개가 금지되었고, 그 후 4년 동안 창고에 머물러야만 했지만 놀라운 영화라는 이야기가 철의 장막을 넘어 서방 세계 영화인들 사이에 떠돌고, 마침내 1969년 프랑스 문화성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의 요청으로 칸 영화제에 제한 상영이라는 형식으로 초대 받았다. 심사위원 들은 이례적으로 제한 상영한 이 영화에 심사위원 대상을 안겨 주었고, 소비에트 문화성은 칸 영화제를 비난했다.

그 이후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일종의 전투가 되었다. 결국 1970년대 내내 힘겹게 <솔라리즈><거울> 그리고 <스토커> 세 편을 만든 다음 타르코프스키는 칸 영화제를 방문했다가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돌아오는 길을 거부당하면서 망명 길에 오르게 되었다. 대부분의 소비에트 예술인들은 망명을 떠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테면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레스, 스비야토슬라브 리헤테르처럼. 그러나 타르코프스키는 이 뜻하지 않은 망명을 저주 받은 운명으로 생각했다. 그는 태어난 대지를 벗어난 예술가는 영혼을 잃어버린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조국을 떠나서 단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 하나는 <노스탤지아>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이다. 그 둘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느냐는 취향의 문제다(이왕이면 둘 다 보는 쪽을 권하고 싶다). 사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아무리 글로 써도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의 영화를 보는 건 거의 기적 체험이다.

<매트릭스>를 보고 난 다음에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면 종종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장면들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거울>에서 카메라는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과 같은 속도로 이동한다. 아직 디지털 기술은 없었고, 그 장면은 특수 촬영한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 때까지 무한정 기다린 것일까? 바람이 불 때 어떻게 카메라는 그와 같은 속도로 이동하는가? 그는 영화에서 마술을 부리는 것 같다.

단지 마술만이 아니라 심오한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대사가 아니라 눈앞에서 펼쳐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노스탤지아>를 찍은 다음 타르코프스키는 쓰러지고 말았다. 의사는 타르코프스키에게 그의 생명이 많이 남지 않았으며, 즉시 요양을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타르코프스키는 그 즉시 준비 중이던 영화 <햄릿>을 포기했고, 그 대신 <희생>이라는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이 영화는 생일에 은퇴한 노배우 알렉산드르가 가족들의 방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3차 세계 대전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밤새 고통에 시달리다 잠시 잠들면 그를 찾아오는 것은 3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다.

알렉산드르는 아침에 그 해답을 얻고, 자신의 집을 불태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집 앞의 말라죽은 나무 아래서 어린 손자가 누워 말한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면 카메라는 그 나무를 따라 하늘로 올라간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를 편집하던 중 운명을 달리했다. 1986년 12월 28일에서 29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그의 뒤를 밟아오는 죽음의 신과 경주하며 영화를 만든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재촉하면서 인류를 위해 예술작품을 바친 사람을, 나는 20세기 내내 타르코프스키 이외에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는 세상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고 믿은 사람이다. 자신을 희생해 <희생>이라는 영화를 남긴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지구상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핵우산 아래서 떨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고 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김선일 씨를 구하지도 못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누가 그를 기억하는가? 그런 세상에서 한 인간이 아무런 대가 없이 세상을 살려달라고 대신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인류를 위한 선물이다. 그 선물을 보지도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혼은 도대체 어디서 구원 받을 수 있단 말인가?

[ 글|정성일(영화평론가) 사진|씨네큐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