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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하루/영화와만남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관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관 1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서의 예술


특별히 영화 전문적인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나의 예술관을 표명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게 여겨진다. 예술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누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가? 예술은 도대체 어떤 누구에 의해서 사용되는가?
이 모든 질문들은 비단 예술가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예술을 감상하거나 소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이다. 이같은 이야기들은 오늘날 빈번하고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으며 유감스럽게도 20세기의 예술과 관객의 관계를 폭로하듯이 나타내주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리고 예술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이 해결책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블록은 시인은 혼돈 속에서 조화를 빚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했으며, 푸쉬킨은 시인에게 예언자의 자질을 부여했다. 모든 예술가는 다른 예술가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법칙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마치 하나의 상품처럼 소비되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모든 예술의 목적은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삶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지구상의 인간 존재의 근본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인간들에게 분멸히하는 일이다. 또는 설명하려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보자 : 논란의 여지 없이 예술의 기능은 내게는 인식시키는 일이다. 어떤 형태로 충격과 카타르시스로 나타나는 파급효과를 얻어 낼 것인가? 이브가 선악과라는 인식의 과일을 먹는 그 순간부터 인류는 영원한 진실탐구라는 언도를 받은 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담과 이브는 제일 먼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들이 깨쳤기 때문에 부끄러워했으며, 그들은 상호간의 즐거운 인식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끝없는 길의 시작이엇다. 영적인 무지의 상태로부터 속세의 절대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광야로 내던져진 자의 비극은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세3:19)

'만물의 정화'라고 하는 인간은 지구 위에 그렇게 나타났으며, 지구 위의 삶에 적응해 왔다. 인간이 그 이후로 걸어온 길을 우리들은 흔히 진화라고 표시한다. 이 길은 또한 동시에 인간의 자기 인식의 고통스런 과정이기도 하였다.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관 2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삶의 본질과 자기 자신, 자신의 가능성과 목적을 그때마다 새롭게 인식한다. 그런 인식과정에서 인간은 기존에 축척된 지식을 총체적으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윤리적, 도덕적 자기 인식이라는 것은 매번 새롭게 겪어야만 하는 그때 그때의 경험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되면, 이세계를 획득하려는 고통스런 요구에 내몰린 채, 자신이 직관적으로 감지한 이상과 이세계를 조화시키고자 애쓴다. 이 채워질 수 없는 요구야 말로 인간적 불만과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고통의 영원한 원천인 것이다.

예술과 학문이란 그러니까 인간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형식인 것이며, 소위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인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창조적 인간 정신의 두가지 표현 현태의 공통성은 끝난다. 그런데 창조성이라는 것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시 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인식의 학문적 형태와 미학적 형태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인간은 현실을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서 파악한다. 학문에 있어서는 인간적 지식은 끝없는 계단의 단계를 좇게되며, 세계에 대한 낡은 인식은 항상 새로운 인식으로 바뀌어져 나간다. 이것은 객관적인 세부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일관성 있게 견해를 지양해 나가는 단계적인 방법이다.
이에 반해서 예술적 견해와 발견은 매번 하나의 새롭고 유일무이란 세계상으로서, 절대진리의 한 상형문자로서 이루어진다. 예술적 견해와 발견은 공개적 표명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세계의 모든 규칙적 양상을 직관적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성급하고도 번뜩이는 정열적 소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이 세계의 아름다은 것, 추한 것, 인간적인 것, 잔인한 것, 무한한 것, 제한된 것, 이 모든 것들을 예술가는 독특한 방법으로 절대적인 것을 포착하는 한 형상의 창조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이 형상의 도움으로 끝없는 진리에 대한 느낌이 제한적 수법을 통하여 표현된다.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통하여,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을 통하여 표현된다. 예술이란 실증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실천이 우리들에게 감추고 있는 저 완전한 정신적 진리와 함께 맺어져 있는 이 세계의 한 상징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을 이런 또는 저런 학문적 시스템과 연결시키고 싶다면 그는 자신의 논리적 사고를 가동시켜야만 한다. 그는 반드시 특정한 교육과정을 거치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은 작품이 우리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가슴으로 느껴지고, 감정적인 충격을 자아내고, 감상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고하는 희망을 갖고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 그리고 예술은 인간을 그 어떤 가치없는 지적인 논증에 예속시키지 않고, 오히려 예술가들이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예의 정신적 에네르기에 의존한다. 그리고 교육적인 기초 대신에 실증적인 의미에서 정신적 경험을 요구한다.

예술이 태어나고 발전되는 곳은 다름아닌 정신적인 것과 이상을 향한 저 영원하고쉴새없는 동경이 가득찬 곳이며, 예술의 주변으로 인간들이 모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지 독자성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의미를 찾는 맹세를 파기한 현대 예술이 제시한 길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일회적인 가치의 정당성만을 추구하는 기이한 사람들의 이상한 짓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 개성이 진실임을 판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좀더 보편적이고 좀더 높은 이념에 이바지 하는 것이다. 예술가란 자기 자신에게 마치 기적과 같이 부여된 재능에 대해 소위 관세를 물어야만 하는 하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오로지 희생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자신을 희생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점을 점점 망각하고 따라서 우리들의 인간적인 결정을 위한 감정조차도 잃어버린다.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관 3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에 대해 말한다면 즉,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부터 태어난 예술의 목적이 또한 바로 이 이상이라고 해서, 나는 결코 예술은 속세의 추한 것들을 피해 가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술적인 형상이란 항상 한가지를 다른 것을 통해서 대신하는 보다 큰것은 보다 작은 것을 통해서 대신하는 일종의 상징인 것이다. 활력에 넘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술가는 사멸한 것을 끄집어 내고 무한한 것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기 위하여 유한한 것을 소개한다. 하나의 내용물 - 무한한 것은 구체화 할 수 없다. 우리들은 무한한 것의 상상적 환영, 그 형상만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 속에 덮여있듯이, 추한 것은 똑같이 아름다운 것 속에 덮인 채로 들어잇다. 삶은 이 부조리할 정도로 대단한 모순 속에 얽혀있으며, 이 모순은 예술 속에서 조화적이면서 동시에 극단적인 단위로 나타난다. 예술적 형상은 모든 것이 서로 인접해있고, 모든 것이 서로 범람하는 가운데에서 조화적 극단적 단위를 인지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우리들은 한 형상의 이념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다. 그 본질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에 의한 묘사란 결코 생각을 올바르게 담아낼 수 없다. 한 형상이란 창조하고 느끼고 공감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지만, 사건의 이성적인 의미의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무한한 것에 대한 생각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아니 묘사하는 것조차도 가능하지 않는 것인다. 오직 예술만이 이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예술만이 무한한 것을 경험할 수 잇도록 해준다.
절대적인 것은 오로지 믿음과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예술가의 투쟁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예술품 창조에 이바지 하겠다는 자세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예술 창조는 가장 비극적인 의미에서 예술가에게 진정한 '스스로의 임무'를 요구한다. 만일 예술 작업이 이렇게 절대진리의 상형문자로 이루어진다면, 이 상형문자들의 하나 하나는 모두 작가가 최종적으로 작품 속에 투영시킨 이 세계의 형상일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이고 냉정한 현실 인식이 끝없는 계단에서의 단계적 전진이라면, 예술적인 인식은 내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폐쇄적 영역들의 끝없는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이 영역들은 서로 보충하고 모순될 수는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서로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 반대로 이들은 서로를 보강하고 전체적으로 무한한 것을 향해 성장하는 특별히 포괄적인 영역들을 형성한다. 스스로 옳다고 확증하는 영원한 타당성을 시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인간이 같은 인간들을 인식하고 표현해 낼 수 있다는 능력을 증언해주는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이해가 창조적인 마지막 목표 즉 삶의 묘사의 중요한 단면을 차지하기 때문에 예술은 그 외에도 깊이있는 상호 교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학문과는 달리 예술작품은 물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어떤 실용적인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일종의 넓은 의미의 언어이다. 이 언어의 도움으로 인간들은 서로 접촉을 시도하며, 이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의 낯선 경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도 결코 실용적인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며, 실용주의와는 완전히 대치되는 희생정신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랑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이다.
한 예술가가 순전히 자시 실현만을 위해서 창작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상호간의 이해없는 자기 실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정신적인 연결이라는 이름아래 행하는 자기 실혀은 아무런 쓸모도 없고 궁극적으로 타인의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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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예술과 학문이라는 직관은 아마도 첫눈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소화의 형태를 서로 좁혀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직관이란 정서적인 창작과정에서는 학문에서와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지만 예술과 학문 모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해"라는 개념 역시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학문적 의미에서의 '이해'란 논리와이성의 차원에서의 공감을 의미한다. 학문적 이해란 학문적으로 관찰한 것의 증명과 유사한 지적인 행위이다. 예술적 형상의 이해란 이에 반해 예술적 아름다움을 정서적 근거, 아니 오히려 초정서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의 직관이란 마치 계시나 영감처럼 나타나더라도 결국은 논리적 발전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변형은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점검받는 것이 아니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논리적 사고에 있어서 의식적인 도약은 해당되는 학문 영역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런 학문적 발견이 마치 어떤 계시나 영감의 결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식이느 학자의 영감과 예술가의 영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한 예술 형상의 탄생은 독창적이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형상, 비이성적인 차원에서 빚어졌으며 비이성적 차원에 존재하는 형상 - 지성의 도움을 받는 경험적 인식과정을 통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예술가가 형상을 창조하면 그는 그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게 된다. 생각이란 세계를 정서적으로 인지해 낸 형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예술적 형상이란 작가에게는 자신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공고물인 것이다. 생각이란 단명하지만 예술적 형상은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감수성이 있는 인간이 한 예술작품에서 받는 인상과 순수한 종교적 체험 사이의 유사성이 거론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은 어린이의 상상력과 심리를 갖고있는 인간이다. 시인이 세계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가 어떤 위대한 이념에 사로잡혀있는지에 상관없이 직접적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세계를 묘사하지 않는다. 세계가 바로 그 자신이다.
예술작품 수용을 위해 꼭 필요한 전제조건은 예굴가를 신뢰하고 믿으려는 자세와 가능성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서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형상이라고 하더라도 때때로 이해되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다. 신에 대한 진정한 신앙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인에 대한 믿음 역시 특별한 영적 자세, 특수한 전적으로 정신적인 잠재력을 전제로 한다.

이같은 생각들은 때때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슈타브로킨과 샤토프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 나는 오직 당신이 스스로 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니콜라이 브제볼로도비치는 그를 강렬하게 쏘아본다.
" 나는 러시아와 러시아 정교를 믿습니다.. 나는 예수의 성체를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러시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믿습니다.."
샤토프는 정신이 나간 채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 신을 믿으시냐구요, 신을! "
" 저..저..믿어보겠습니다. "

더이상 무엇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인가? 이 장면은 어찌할 바 모르는 당황한 영혼의 상태를 천재적인 수법으로 포착하고 있다. 정신적 가난과 정신적 불안은 점점 더 현대인의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이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는 이런 현대인을 정신적 무능력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관 5

아름다운 것은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감춰진 채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채로 예술을 수용하고 평가하는 자의 정신적 무능력은 흔히 다음과 같은 통속적으로 간결화된 상투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맘에 들지 않아', '재미없군!' 이것은 강렬한 추론이기는 하지만 무지개를 묘사하려는 장님의 추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예술창작 과정에서 고통을 겪게 되며, 이는 그런 고통을 통하여 얻는 진실을 남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상투적 표현으로 일축하는 정신적 무능력자들은 예술가의 이런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럼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가장 슬픈 특징 중의 하나는 오늘날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름다운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반응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현대의 대중문화는 영혼을 기형화 시키며 인간들이 자신의 존재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점점 더 차단하고, 정신력을 소유하는 존재의 하나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점점 더 가로 막는다. 그러나 예술가는 유일무이하게 자신의 창조적 의지를 결정해줄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외면해서도 안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예술가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이 믿음이 없는 예술가는 마치 장님으로 태어난 화가와 같다.

한 예술가가 자신의 테마를 찾는다는 말은 틀린 말일 것이다. 테마란 예술가의 내면에서 마치 과일처럼 익어가는 것이며, 그 형상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생명체의 탄생과 샅은 것이다. 예술가는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예술가는 상황의 주인이 아니고 하인이다. 창조성이란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형태이며,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는 자신이 자유롭게 거절할 수 없는 하나의 행위를 의미한다. 논리에 맞는 특정한 조치의 필연성과 그 규칙성에 대한 감각은 이상을 향안 믿음이 있을 때에만 생기는 법이다. 오직 이 믿음만이 예술 형상들을 조직적으로 뒷받침해준다.

종교적 진실의 의미는 희망이다. 철학은 인간이성의 한게와 인간행위의 의미,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가운데 진실을 추구한다. 이 주장은 한 철학자가 인간의 존재와 행위는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입장에 도달했더라도 그대로 해당된다.
흔히들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예술의 기능적 규명은 사고를 촉발시킨다든가 이념을 전달한다든가 혹은 하나의 사례 구실을 하는데 있지 않다. 아니 예술의 목적은 인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의연하게 준비하게 하고 인간이 죽음을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서 만날수 있게 해 주는 데 있다.

봉인된 시간, 타르코프스키(김창우 옯김), 분도출판사 p 45- 53

출처 http://yon2c.hihome.com/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