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혼, 화가의 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 정성일
## 연보 ##
1932년 4월 4일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남.
1954년~1956년 시베리아에서 지질학 공부.
1956년 VGIK 감독코스에 입학.
1958년 습작영화<오늘 저녁에는 외출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1960년 졸업작품<증기기관차 운전사와 바이올린>.
1961년 <증기기관차 운전사와 바이올린>으로 뉴욕 학생영화제 1등상 수상.
1962년 <이반의 소년시절>.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 수상.
1966년 <안드레이 루블레프>.
1969년 <안드레이 루블레프>로 칸느영화제 국제영화제 비평가상 수상.
1970년 6월 `이스꾸스뜨보 끼노'에 단편 `하얗고 하얀날'발표.
1971년 <솔라리스>. <솔라리스>로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1975년 <거울>.
1977년~1979년 <안내자>.
1980년 <안내자>로 칸느영화제 `경이의 영화' 부문 대상 수상.
1982년 <향수>.
1983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극장에서 무대극 `보리스 고드노프' 연출.
<향수>로 칸느영화제 창조대상 수상.
1984년 7월 10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망명 선언.
1985년~1986년 <희생>.
1986년 <희생>으로 칸느영화제 국제영화심사위원특별상, 국제영화비평가상,
기술대상, 예술특별공헌상 등 수상.
1986년 12월 28일 파리에서 간암으로 사망.
## 시인의 혼, 화가의 눈 ##
1. 1980년대 영화와 타르코프스키
1980년대 세계 영화는 영화보다는 이론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포스트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 기호학과 막시즘, 페미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1970년대 백가쟁명의 시대를 거쳐 이제 푸코와 라캉, 알튀세와 들뢰즈/가타리, 데리다와 리오타르, 크리스테바와 솔레르스, 프레드릭 제임슨과 테리 이글튼, 에드워드 사이드와 폴 드 만으로 이중 삼중으로 무장한 이론가들은 메츠(Christian Metz)로 시작되는 거대이론의 붕괴이후 영화에 관한 미시적 정치학,미학(이 두가지 전통의 탈 중계적인 장르화)을 제시했고, 영화는 자기 자신의 전통으로부터 뒤로 물러서서 그 자신의 진실/거짓에 관한 고통에 사로잡혔다. 영화의 이미지는 진짜로서의 거짓 담론인가? 아니면 그 역도 성립하는가?
1968년의 정치적 흥분은 이제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제국주의로서의 헐리우드,모스필름에 전투선언을 외쳤던 고다르는 1980년 <할 수 있는 자를 구하라>로 상업영화로 복귀하였다. 네오리얼리즘의 마지막 거장 펠리니는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1983>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인공낙원에 안주하고 있었으며, 기독교 전통의 유럽영화 컨텍스트 내부에서 성서적 메타 내러티브의 세계를 그려온 베르히만은 1982년 <화니와 알렉산더>를 마지막으로(연극을 찍은 <리허설 후,1984>를 제외하고) 영화계에서 은퇴하였다.
전후세대는 은퇴하였고, 다만 벤더스만이 <파리, 텍사스,1984>와 <베를린의 하늘,1987> 로 1980년대의 영화적 전통을 지켰다. 그러나 벤더스가 그려낸 영화는 인공/표면이라고 알려진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의 영화적 재판이며, 이것은 영화에서 철학이란 진짜가 아니라 오히려 가짜로 시작된 메타포로서의 표상,재현이라는 절망적인 대답만을 메아리 없이 들려주었다. 이제 영화의 전통을 단절된 것처럼 보였으며, 영화에서 작가의 죽음은 결코 바르트식의 잘난 체하는 말장난으로서가 아닌 심각한 영화사의 거대한 오류에 대한 결론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새로운 영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만의 신랑차오 후 샤오시엔과 중국의 제 5세대 첸 카이거는 영화의 역사적 임무와 작가의식 사이에 놓여진 근본적인 명제 `영화는 누구로부터 시작하는가'에 관해 끈질기게 지난 10년간 질문을 던졌다. 또한 천재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레오 까라는 AIDS시대에도 사상과 시적인 영감이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시대정신의 위기감을 표현주의적 영화전통과 1920년대 아방가르드 시대의 공간속에서 거듭 물었다. 1980년대에도 사기꾼들은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짐 자무쉬와 장 자크 베네는 매스컴의 화려한 선전 문구 속에서 스타처럼 데뷔하여 거리에 버려진 개처럼 잔인하게 비평적 재난을 맞이하였다. 모든 것은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고, 1980년대는 공허한 기분만이 가득 차 있어서 이제 벤야민이 경고했던 기계봉제 시대의 기(aura)의 파괴는 우리시대에서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83년, 칸느영화제는 일종의 기적을 맞이하였다. 그랑프리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에 돌아갔지만, 비평가들과 영화광들을 사로잡은 것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였다. 일종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 같은 영화의 세계사적 전통은 타르코프스키라는 이름을 찾아 낸 것이며, 이 소련 감독(그 자신은 언제나 러시아의 감독이라고 불러주길 원했던)을 통해서 1980년대의 컨텍스트를 찾아내게 되었다.
이 설명은 낯설어 보일 수도 있다. 우선 <향수>는 타르코프스키의 첫번째 영화가 아니며, 또한 서방 세계에 알려진 첫번째 영화도 아니다. 그의 데뷔작 <이반의 소년시절>은 이미 1962년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으며, 제한된 영화제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그의 영화는 꾸준히 출품되어 서방세계의 비평가들에게 끊임없이 `발견'될 기회를 가졌고, 또한 평가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의 타프코프스키 르네상스는 다소 과장된 것이며, 비평적 수다스러움도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향수>로 다시 `발견' 될 때 까지 따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그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지난 그의 영화에 관한 평가는 주로 유럽적 전통의 `사이비' 예술영화의 상투적인 상징비평이나 진부한 주제 비평에 의해 가려져 있었으며, 또한 바쟁의 거대한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는 강단 비평가들에게 리얼리즘의 저편에서 작업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존재는 낯선 대상이었다. 게다가 1960년대 이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막시즘 비평은 심지어 반 에이젠슈타인적인 그의 영화에 적대적이기까지 했으며,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내부에 잠겨있는 비판적, 민중적 시학의 세계관은 받아들여질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설적 의미에서 제한된 영화제에만 소개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서방세계 비평의 무자비한 재판과 비평 산업의 대중적 소비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 모든 흐름과는 아무 관계 없이 <향수>는 칸느영화제에 초대되었으며, 1983년은 이미 비평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리고 새로운 영화 이론은 <향수>앞에서 두가지 사실 중의 하나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 하나는 지금까지의 영화에 관한 이론적 논쟁이 무의미했거나 아니면 영화와 별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며, 그도 아니면 둘 다라는 자기비판이었다.
<향수>를 계기로 타르코프스키가 소련에서 만든 영화들이 새로이 서방 세계에 소개되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심각하게 훼손되었거나(특히 <솔라리스>는 166분 상영시간인데, 프랑스에서는 144분으로 그리고 미국에서는 98분으로 그동안 소개되었다) 명성만 알려졌던 영화들이 근본적으로 재평가받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서방 세계의 비평가들은 우선 그의 영화가 장시간 촬영 스타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했으며, 주로 베르히만의 영화와 비교하였다. 그러나 서방 세계에서 그의 유작이 된 <희생>을 찍는 동안 이루어진 인터뷰를 통해서 그러한 비평적 틀이 아무 쓸모가 없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데쿠파주 비평과 장면화 분석이 그의 영화 앞에서 차례로 폐기처분되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의 전작품을 통해 지켜온 원칙, 즉 자신은 러시아 인이며 그 외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기를 금지시켜온 끈질긴 노력, 영화가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영화 그 자체이며 또한 영화에서 거듭 진실의 문제를 물어보고 그 물음의 과정을 통해서 세계관을 세우고 그 자신이 희생되어야만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 그 노력과 시념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영화관객을 한없이 사랑하는 대화로서의 영화만들기라는 끝없는 자기성찰을 실천하였다. 이 도덕적이며, 철학적인 태도는 그의 영화를 통해서 과장된 적이 없으며, 또한 영화이론이라는 이름으로 그 척도를 가늠하는 그 어떤 과학적인 태도에도 그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손상받지 않았다.
잉마르 베르히만은 "만일 영화가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건 타르코프스키라는 시네아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부르조아들이 즐겨찾는 그런 어용 예술가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권력과 싸워 왔으며, 민중들의 정서와 기억, 향수와 희망에 관해서 거듭 말하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체제의 영화에 관한 검열과도 타협한 적이 없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상업영화에 대해서도 비판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전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 생산양식 체제내에서 활동하며 영화작업을 해오면서, 또한 다가올 미래로서의 사회주의 체제하의 영화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비극을 경험해야만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우리시대에 살면서도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 오히려 영화가 태어나기 이전의 과거로까지 되돌아가서 인류에 관한 희망을 다시한번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영화가 해야 할 의무를 상실하고 그 자신의 언어를 상실한 채 탈 주체의 공간에서 거듭 상호텍스트라는 이름으로 탈 역사화된 1980년대 영화에 시네아스트의 임무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다시 물어본 준엄한 이름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2. 어린시절의 타르코프스키 또는 기억으로부터의 통과제의
안드레이 아르세니예비치 타르코프스키는 1932년 4월 4일 볼가강 유역에 있는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는 소련의 유명한 시인이며 모스크바 대학 교수였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 이바노브나 비슈나코바는 인쇄소 교정공이었다. 불행히도 1936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고,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여동생 마리아와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그가 자란 자브라이예는 특히 비가 자주 온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러시아에서의 모든 풍경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리는 비는 그의 일부가 되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스크바로부터 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고향에 대해서 언제나 러시아라는 것을 발견해냈다. 그에게는 어린시절 시골에서 본 비와 불, 눈과 물, 이슬, 들판들이야 말로 삶의 진실이며, 그의 영화 속에서 마치 주제처럼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러한 자연 현상들이 이상한 일로서 그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가사의한 삶의 형태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어머니 비슈나코바는 어린 타르코프스키에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즐겨 읽어 주었다. 이 독서의 과정은 그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이 읽어주기와 듣기의 과정은 타르코프스키가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톨스토이의 산문이 갖고 있는 세부적인 훌륭함과 작가의 섬세한 표현을 하나씩 지적하여 거듭 읽기를 권했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는 어린 시절의 예술학교 구실을 했으며, 더 나아가 예술적 감각과 그 깊이를 가늠하는 판단 기준이 되었다.
그는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학교를 다녔고, 음악학교 과정도 함께 이수하였다. 그리고 3년간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1952년 동양어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였다. 여기서는 일본어에 특히 관심을 가졌으며, 고대 일본의 시 양식인 하이쿠의 전통적인 문체인 삼행시를 즐겨 읽었다.
1954년 부터 1956년까지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하며, 실제로 지질학 탐사반으로 일했다. 그는 이 시기가 자신의 `단련의 시간'이었으며, 이때 `관찰의 훈련'을 쌓았다고 말한다. 해저 탐사반으로 참가하면서 해저 밑의 느린 물결의 흐름을 보게 되었고, 촬영기로 이러한 느린 흐름/리듬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온 타르코프스키는 1956년 국립영화학교인 VGIK 의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는 시험 전날 장 르느와르의 <지하세계,1936>을 보았다고 기억하며, 영화감독으로의 입문 전날 본 이 영화는 그에게 수수께끼같이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무언가 금지되고 부자연스러운 감정, 이것은 4년간의 VGIK 생활을 그대로 예감케하는 것이었다.
타르코프스키는 감독 코스에 입학했으며, 지도교수는 미하일 롬이었다. 에이젠슈타인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특히 감독으로서 유물사관에 입각한 철저한 막스레닌주의 영화(좀더 정확하게는 스탈린 당노선에 따른 `인민예술영화')를 추종했으며, 1937년 <1918년의 레닌>이 높이 평가되어 VGIK 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와 안드레이 콘짤로프스키를 만났다. 그러나 그러한 후일의 영화 동료들과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VGIK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수업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을 학교에서 결코 배울 수 없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과정이었으며, 그저 기술적인 능숙함과 작업 방법만을 가르쳐주었을 뿐이었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문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잊는 것이다.
VGIK 의 교육은 주로 촬영현장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현장에서 일하는 감독들과 배우들이 직접 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으며, 타르코프스키는 이 과정을 통해서 빠라자노프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쌓는 과정은 `아주 어처구니없게도' 서방 세계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당국의 영화교육정책에 의해 제한적인 과정이 되었다. 그것은 서방세계의 영화의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며, VGIK 에서는 다만 1930년대 혁명영화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는 이 과정에서 도브첸코의 영화를 만났으며, 특히 <대지>를 통해 그 자신의 영화적 출발점을 삼게 되었다.
타르코프스키는 1958년 대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다. <오늘 저녁에는 외출허가가 나오지 않았다>라는 이 습작영화는 그의 영화과 친구인 알렉산드르 고든을 조감독으로 처음은 졸업예비작품 단편영화로 시작되었다. 습작으로서는 비교적 긴 시간이 된 이 작품은 학교 기자재와 중앙 텔레비젼 스튜디오에서 완성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아 있는 독일군 지뢰를 제거하는 내용이었다.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쓴(그 자신의 표현으로) 아주 형편없는 시나리오에 따라 촬영되었으며, 이것이 영화라고 불러줄 만한 어떤 완성도도 지니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단편영화의 분량으로 장편영화를 만들기 원했으며, 게다가 진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미학적 목표를 세우지도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적인 평론집을 쓰던 당시인 1986년 까지도 단편영화를 한편 찍을 수 있기를 원했으며 이미 초안까지 만들어 놓았으나, 결국 만들지 못했다. 그 중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시를 단편으로 옮기기 위한 메모를 장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다섯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황 설정 쇼트로 시작한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그 아들에서 손자로 이어지며, 이 삼대의 등장인물은 나무와 하얀깃털로 연결된 접사로 차례로 등장한다. 사운드는 시를 낭독하면서 이어지는데, 음악은 하이든의 이별교향곡 마지막 부분이 들리도록 하는 배려까지 되어있다. 흥미있는 것은 시 구절에서 거듭 반복되는 어머니라는 단어는 화면에서 거기에 대응하는 영상적 대상을 부재하는 상상주체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 낭독이 시작되는 셋째 쇼트는 `내가 배고픔과 두려움으로 앓아 누웠던 어린 시절'이라는 문장이 모닥불의 접사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아버지에로 이어져서 불과 아버지로 연결되며, 촬영기는 풍경속에 서서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된다. 그러나 그 걸음걸이는 나무 사이로 아버지를 놓치고 아들을 보게 된다. 이것은 시의 이미지 대신 시의 운동방향, 물러섬과 손짓하기에 따라 촬영기와 대상사이의 거리 지우기로서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래서 시의 언어들은 설명하기 대신 들리기의 영상-감정과 영상-지각 사이에 세워진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은 `어머니는 다가와, 내게 손짓하고/그리고 날아가 버리시네' 라는 마지막 부분이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풀밭으로 떨어지는 흰 깃털로 끝을 맺는다. 날아가는 것(시니피앙의 시니피에)은 떨어지는 것(시니피앙의 시니피앙)과 함께 마무리를 짓는다. 이 끝은 아들의 시선으로 다시 시작하여, 하이든의 이별교향곡으로 이어진다. 이 떨어짐은 아들에서 다시 손자로 이어지며, 이것은 시-언어 라는 내레이션 대신 하이든의 음악으로 옮겨져 영상-시간으로 바뀐다. 네번째 장면까지 지적되지 않은 시간이라는 요소는 음악과 함께 시작하여 어두워지는 숲 저편의 선명하지 않은 천사로 다시 한 번 더 끝난다. 이 두번의 끝남을 통해 타르코프스키는 영감을 통해 얻어진 시나리오는 총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현실의 영상으로 바뀌는 시간, 실제적인 영화 표현수단으로 옮겨지는 바로 그 시간이야말롤 포착되어 봉인된 시간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졸업작품 <증기기관차 운전사와 바이올린>은 1960년에 완성하여 이듬해 뉴욕 학생영화제에서 1등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알베르 라모리스의 <붉은 풍선>에서 영감을 받아 꼰찰로프스키와 함께 시나리오를 썼으며 또한 그와 후일 오랜 동료가 된 촬영기사 바딤 유소프를 만나게 되었다.
어린 소년 샤샤는 언제나처럼 오후에 바이올린 학원에 간다. 그러나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것은 그에게 큰일이다. 왜냐하면 아파트 아이들은 '꼬마예술가'를 곯려주는 일을 오후의 행사처럼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는 1930년대 이후 문예정책 노선에 따라 세워진 스튜디오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이 스튜디오로부터 빠져나가 거리로 나가는 사샤와 함께 촬영기는 인공의 조명의 세계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스튜디오로서의 안과 거리/현실로서의 밖을 세워놓고, 밖으로부터 안을 다시 생각한다.
거리에 나선 사샤는 학원에 가는 길에 공사중인 건물을 지나게 된다. 건물 앞에 세워놓은 거울은 사샤에게 빛을 선사하고, 사샤는 거울이 이리저리 나누어 놓은 세계를 보게된다. 이 장면은 거리에 서 있는 사샤와 건물을 안과 밖으로 연결하는 두번째 모티브로 보여진다. 크레인 쇼트로 부터 시작하여 건물과 사샤 사이를 가로질러 여인이 풍선을 들고 지나가는데, 허공에로의 부력의 이미지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창문틀과 그 사이에서 저편을 재현/표상하는 하늘로서의 거울로 이어진다. 여기서 타르코프스키는 현실속의 꿈, 현실과 상상을 연결하는 것이 몽타주가 아니라 장면화로서의 영상 - 운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적 수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연극적이어서는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내밀한 세계로서의 꿈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신비하게 감추어진 것으로서가 아닌 꿈의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속임수 없는 리얼리티로서의 꿈의 세계를 끄집어내는 화면을 만들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며 그 어떤 의미에서 철저하리만큼 근본적인 유물론자일지 모른다는 비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이 원칙은 그의 습작에서부터 유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지켜졌다. 다만 좀더 정확하게 이 원칙은 하늘에서 시작하여 땅으로 내려오는 크레인에서 이후 수정되어 땅에서 하늘로 상승함으로써 하강과 상승의 이미지를 예수강림의 회화구도로 좀더 접근시켰다.
바이올린 학원에서 바깥에 두고 온 사과 때문에 나쁜 점수를 받은 사샤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증기 기관차 운전사 세르게이를 알게된다. 증기기관차를 함께 운전하고 친해진 두 사람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간다. 그러나 거리에서 나이 어린 소년을 괴롭히는 불량소년을 말리다가 또 다시 검은 그림자로 화면이 지워진 `안으로' 들어가 대신 매를 맞는다. 노동자 세르게이는 `밖에서' 지켜보다가 우는 사샤를 데리고 수돗가로 데려간다. 이 장면은 타르코프스키가 이후 거듭 반복 사용하게되는 물의 이미지의 첫번째 장면화의 원형을 보여준다.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로 수직분할된 화면은 수돗가로 걸어오는 사샤와 세르게이를 심도촬영으로 보여준다. 사샤가 얼굴을 씻는 동안 세르게이는 옆의 노동자와 대화를 나눈다. 사샤는 아이들이 자신을 `예술가'라고 놀리며 함께 놀아주지 않는 것이 싫었는데, 세르게이가 `노동자가 아니고 예술가'라고 말하는 것에 화를 내며 점심인 빵을 집어 던지고 울며 걷는다. 여기에는 세 개의 물이 소우주를 이루는데, 수도꼭지의 물과 대지에서 흐르는 물 그리고 사샤의 눈물이다. 여기서 수도꼭지의 물과 눈물은 중력의 원칙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대지에 흐르는 물은 화면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며 특히 이 쇼트는 드물게 위로 올라가 촬영기를 위치시켜 놓고 있다. 이 영화적인 흐름으로서의 물은 수도꼭지의 첫 장면처럼 화면을 수직분할 하는데, 다만 그 시선의 높이는 노동자들의 건설의 기계로 둘러싸여 하나의 소우주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세계는 다음 시퀀스에서 그 역구도를 이룬다.
이 두 사람을 연결하는 다음 모티브는 바로 앞의 장면에 대한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이제 물과 노동의 이미지는 뒤바뀌어 파괴/건설의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로서 물의 공간이 이어진다. 이 시퀀스는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로서의 바람과 흔들림으로서의 빛(사운드와 이미지)으로 시작한다. 바람과 빛이라는 자연현상은 구체성으로서의 비로 연결되며, 자연속에서 파괴/건설로서 낡은 건물을 부수는 노동으로 이어진다. 소우주와 이미지는 앞의 세계관을 역전시킨 것이면서 또한 그 반복/차이로서의 대답처럼 보이는데, 특히 이 시퀀스는 에이젠슈타인의 영화형식의 변증법적 접근과 그 갈등의 몽타주를 거의 교과서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졸업을 하면서 학생영화가 지도교수로부터 받는 영향에 관한 하나의 통과제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비와 건설의 현장이 부서진 건물 건너편의 건물(이중 프레임) 창문에 구름 사이로 나온 햇빛이 비치는 장면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은 타르코프스키적이면서 또한 1950년대 소련영화의 시퀀스 구성원리의 전형성에 다름 아니다.
이 정합성으로서의 시퀀스 뒤에 이제 타르코프스키는 그 자신이 평생을 통해 던져야 할 질문을 시작한다. 예술을 왜 존재하는가? 누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가? 예술은 어떤 이들이 원하는가? 그리고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 시대에서 예술과 관객 사이의 관계를 폭로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샤는 세르게이를 물이 보이는 건물내부(밖으로서의 안)에 앉히고 소리를 고르며, 공명이 가장 좋은 위치에서 연주를 시작한다. 어린 예술가는 노동자를 앉혀놓고(그는 선생님이 아니며, 또한 비평가도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닌 예술 그 자체에 가장 가까워 질 수 있는 위치에서 연주를 시작한다. 이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 예술과 노동사이의 위치라는 등식을 어린이와 친구사이의 거리라는 것으로 치환시켜 놓은 이 공간은 그에게서 영화라는 예술은 상징이나 은유라는 장막의 저편, 그래서 부르주아들이 거듭 신비화의 수단으로 삼는 피신처로서의 장면화가 아닌 구체적 사실로서의 물질성, 상징에 얽매이지 않는 하나의 사실로서의 삶의 시간법칙이 바로 영화적 형상이며 장면화의 본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샤에게 예술의 기간은 계속되지 않는다. 영화를 함께 보기로 한 사샤와 세르게이의 약속은 사샤의 어머니에 의해 일방적으로 깨진다. 이제 다시 안과 밖은 임의적이자 또한 구체적으로 나뉘게 되며 세르게이는 약속시간이 지나자 떠난다. 떠나는 세르게이를 향해 편지를 써서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지만 결코 닿지 않는다. 남은 방법은 상상하는 것뿐이다. 이 영화는 세르게이를 향해 뛰어가는 사샤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롱 쇼트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끝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언제나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던 영화 작업과, 한편의 영화가 끝나고 다음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사이에 끼어드는 아주 길고 고통스러운 휴식이 시작되었다. 한 예술가가 철저히 고통받고 망가진 뒤에 갖는 관객의 행복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3. <이반의 소년시절>, 꿈꾸기로서의 전쟁
(I)
Q: 당신의 데뷔작을 <이반의 소년시절>로 선택한 것은 어떤 동기에서입니까?
A: 이 영화에 얽힌 이야기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모스필름은 <이반의 소년시절> 제작을 다른 감독, 다른 배우, 다른 기술진으로 시작했었습니다. 이미 절반 이상 찍었고, 제작비도 절반 이상 투자 되었습니만 그 결과가 나빠서, 모스필름은 제작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감독을 찾았지만 명단에 오른 감독들은 모두가 거절했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선 블라지미르 보고모로프의 원작을 다시 읽었습니다. 전체를 다시 쓰기 위해서죠. 나는 이미 찍혀진 필름을 포기하고, 새로운 배우와 기술진과 함께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로에서 부터.
(II)
타르코프스키의 데뷔작 <이반의 소년시절>은 1962년에 제작되어 그 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이탈리아의 제 2기 네오리얼리즘 계보에 속하는 발레리오 줄리니의 <가족연대기>와 함께 그랑프리인 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또한 같은 해엔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선 감독상을 받았다. 신인으로서는 전례가 들문 데뷔이긴 하지만 시대는 누벨바그의 전성기, 그 해 베니스영화제에는 고다르의 <자기만의 인생>이 심사위원특별상과 이탈리아 비평가상을 받았으며, 브레히트 정신의 소외효과와 헐리우드 멜로드라마 전통의 콜라주 기법이 시대의 영화정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소련에서 온 이 낯선 감독은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놓쳤으며, 심지어 후르시쵸프 시대의 소련 영화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홍보영화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스탈린 시대의 종지부를 찍기위한 후르시쵸프 정책은 우선 문예노선에서 형식에 관한 선택을 허용치 않던 당의 지난 정책을 `오류'라고 비판하고 그 형식은 예술 창작에 종사하는 작가들의 몫으로 허용하였다. 그래서 후르시쵸프 시대의 문예부들은 교조적 리얼리즘으로부터의 탈피를 선호했으며, 당 정책은 또한 그런 문예물들을 정책 선전에 이용하였다.
<이반의 소년시절>이 그랑프리를 수상하자 이탈리아의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변호를 하고 나선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는 `사회주의 쉬리얼리즘'이라는 말로 이 영화를 지칭했다. 이러한 장르도 스타일도 아닌 이름나누기는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는 틀린다. 이 영화를 초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컨텍스트에서는 옳지 않지만, 사르트르를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와 다른 부류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는 옳다. 또한 이 영화가 사회주의 체제내에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교조주의를 지향하고 있지는 않다. 더구나 후자의 `성향'은 그의 데뷔작 이래 소련 당국에 의해서 `불순한' 영화감독으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반의 소년시절>은 이반 얼굴 앞을 가린 나무의 접사에서 시작한다. 정지된 촬영기는 이반이 화면 밖으로 나가면 나무를 따라 수직으로 상승한다. 수직으로 상승한 촬영기가 정지할 때, 이반은 다시 화면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원근감이 일정하지 않으며, 크로노토프로서의 접합이 낯설어진다. 이러한 봉합없는 접합, 그래서 상대 쇼트의 거리감으로부터 생기는 원근법과 상상적 타자를 상실시키고, 그러한 이유로 시점의 영화로부터 감정-감각의 영화로 새롭게 정의된다. 이것을 타르코프스키는 시적 고리 또는 시의 논리라고 부른다. 영화 장면을 직선적/논리적으로 주제에 따라 시종일관되게 연결하는 것보다 오히려 주제나 연기로부터 벗어나 삶의 복잡한 현실을 어떤 고리로 다시 연결하여 그것을 해석의 순서에 따라 보여주느냐가 오히려 문제의 관건이라고 지적한다.
이 낯선 공간, 시적 고리의 논리에 따라 이어진 화면은 염소/나비와 이반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상대적인 컨텍스트로서의 상대 쇼트는 시점으로 접합되는 대신 이동으로 그 공간을 열어놓는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크레인 쇼트는 이반을 우물가까지 데려간다. 이반은 우물에서 물을 긷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이반의 어머니로 나온 이르마 타르코프스카야는 <이반의 소년시절> 후 소련에서 만들어진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영화의 스크립트를 했으며, 또한 그의 아내이기도 하다.) 달려간다. 여기서도 촬영기는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화면을 메우는 이반의 등 뒤에 서 있는 촬영기는 뛰어가는 이반을 따라 이동하다가(주관적 시점) 화면 격자 내부로 전신이 보이는 순간 정지하며(객관적 시점) 어머니와 이반을 보여준다(상황설정쇼트). 이것은 산문의 질서 내부에 들어와 있는 시적 세계관처럼 보인다. 장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며, 현실과 관계를 맺는 특수한 방법인 것이다. 공중으로 떠올라 그의 어머니에 이르는 상승의 영상을 감정적인 힘이라고 부른 타르코프스키는 이 장면을 만들면서 러시아의 시인 오시프 반델스탐, 소설가 보리스 빠스체르나크, 채플린, 도브첸코, 미조구찌 겐지를 자신의 예로 삼았다. 그러나 이 영화사적인 예는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구체적 경험을 프리즘처럼 통과하여 물질적인 꿈이 되었다. 이 시퀀스는 그 자신의 네살때의 추억으로부터 구성되었으며(타르코프스키의 기억에 따른다면) 외부세계와의 최초의 만남이 이루어진 시기로부터 직접적인 기억을 옮겨 놓은 것이다. 여기서 그는 원칙을 하나 세우는데 추억을 시적으로 옮겨놓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예술적 재구성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관한 특수한 감정적 분위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반복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의 기원을 상실시키는 것은 기억이라는 시를 부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감정적인 난데없는 총소리로부터 이반의 꿈을 깨워 놓는다. 그곳은 전쟁의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이반은 서둘러 자신의 피신처에서 빠져나온다. 멈추어 선 풍차, 바람이 불지 않는 세계로 돌아온 이반은 이제 자신의 꿈과 그 반대의 질서를 따라 가혹한 현실로 돌아온다. 롱 쇼트로 풍차 헛간을 나와 화면 밖으로 나간 이반은 바로 접사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해는 사선처럼 화면을 가로지른 언덕 저편으로 저물고, 그러면 하늘에서는 쓸쓸한 축제처럼 조명탄이 터진다. 그 조명탄의 낙하를 따라 촬영기는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영화 첫 장면의 반대운동 방향). 그러나 촬영기가 내려온 곳은 평화로운 대지가 아니라 진흙탕이 되어버린 수렁처럼 늘어선 드네프르 강가다. 척후병 이반은 지금 독일군의 동태파악을 끝내고 본대로 귀환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이 소설을 영화화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세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이반 소년이 죽음에 이르는 운명을 다룬 그 마지막에 관한 일관성이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의 죽음이란 미화되거나 또는 그 어떤 다른것이 되지만 여기서는 그 자체이며 말 그대로 죽음이란 이반의 삶 전체이며, 바로 그 삶 속에서 전쟁의 야만성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원칙에 따라 <이반의 소년시절>을 찍었으나, 잘못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일인칭 영화가 아니며(특히 꿈 장면을 둘러싼 오류와 의역들) 또한 자서전적인 해석을 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전쟁 소설이면서도 끔찍한 전쟁장면이나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쟁 전체로서 이 영화는 이미 한차례의 전투가 끝나고 그다음 전투가 시작되기 전 사이의 그 짧은 예상치 않은 휴식속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그러나 이 휴식은 감아 놓은 철사 스프링이 마치 끊겨 버릴 듯한 긴장감에 가득 차 있는 것이며, 바로 이 긴장감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중요하게 만들었다. 이것을 그는 지하 밑바닥에서 웅성거리는 그런 느낌이라고 덧붙이는데, (정확한 것은 알수없지만) 영화 마지막에 이반의 죽음이 확인되는 것은 지하실 바닥에 널려진 파일 박스 속에서다.
마직막으로 이반이라는 어린 소년의 성격을 들고 있다. 이것은 특히 중요하게 느껴지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반이라는 소년은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원점일 수도 있다. 그것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속에서 연대순으로 주인공들이 차례로 나이가 들고 있는 이례적인 특징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주인공들은 다른 어떤 점보다도 차례로 나이를 먹고 있는 점에서 결코 그 역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 순서를 뒤바꾸지도 않는다. 마치 그의 영화 전체가 인생의 한 주기를 이루며, 삶에 관한 성장기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반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사랑하는 것은 타르코프스키의 세계관은 감싸 안는, 작지만 중요한 걸음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반을 전쟁 때문에 삶의 궤도로 부터 이탈하고 파멸당한 일물이라고 부른다. 그는 모든것을 잃어버린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 전쟁으로부터 악마적인 선물을 받는다. 그건 이반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절망적인 긴장감이다. 상황속에서의 첨예한 갈등과 원칙의 파괴, 긴장의 지속적인 상태, 극단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인간을 그는 자기 자신의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오랜 영화 경력 속에서도 어떤 형태로 부터의 전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절망적인 긴장감과 싸우며, 또한 그 싸움 속에서 원칙의 파괴로부터 부단히 그 자신을 지키려고 영화만들기를 반복한다.
<이반의 소년시절>에서 그 지키기로서의 원칙은 네번으로 이루어진 꿈으로 거듭 돌아온다. 두 번째 꿈은 부대로 귀환한 이반이 책임장교와의 면회를 요구하며 갈체프 중위의 막사에서 잠들면서 시작한다.
이 시퀀스는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영화이면서 또한 동세대 소련 시네아스트들의 새로운 영화에 관한 일종의 출발처럼 보인다. 갈체프 중위의 막사내부는 1940년대 소련 영화가 주로 영향받은 코진체프류의 실내 조명과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 VGIK 에서 배운 교과서로서의 이 공간에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방법으로 빠져나간다. 커다란 욕조통에서 목욕하는 이반은 벽에 비친 그림자 앞에서 앙상한 몸을 드러낸다. 이 물은 화로에서 타오르는 따뜻한 불길의 장면으로 이어지고(느린 이동, 마치 이반의 피곤함의 무게만큼이나), 밥을 먹는 이반이 보인다. 식사하는 책상에 촛불이 켜져 있지만(포커스 아웃), 중요한 것은 물소리다. 이미 꿈의 입구는 자신의 문을 열고, 기억의 시간으로 이끄는 소리가 장면보다 먼저 시작한다. 그 울림은 침대로 이어져도 계속들린다. 따사로운 화롯불에서 물로, 피곤에 지친 낡은 구두로 거기서 나무(영화 첫 장면이 나무였음을 기억할 것)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세숫대야로 이어지면 그것이 이반의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것이었음을 촬영기의 이동으로 보게된다. 그러면 이반은 어느새 우물가에 와 있는 것이다. 다만 이반의 침대는 우물 아래 있고, 또 하나의 이반이 어머니와 저 높은 우물 입구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꿈속의 내려다보는 시선과 올려보는 시선은 역전의 관계를 이루며, 관객이 촬영기와 갖는 상상적 공간의 질서 사이를 전통적 회화의 깊이와 다른 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뒤바꿈이 아직까지는 후기 영화의 중세 회화 구도로까지 구체화되지는 않았으나, 여기서 보여준 또다른 깊이의 질서는 지금까지 에이젠슈타인적인 몽타주적 질서와 웰즈, 르느와르적 공간과는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원리는 단순하지만(위치/재위치의 반복)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원근법 외부에 설정해 놓으면서 화면을 몽타주와 리얼리즘의 영화사적 전통으로부터 열어놓는다. <이반의 소년시절>에서 꿈으로 제한된 이 열어놓기로서의 화면은 다시 확대되는데, 타르코프스키는 사건의 논리와 주인공의 행동,행위의 양식이 서로 혼돈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영화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혼란스러움에서 주인공의 생각과 기억 그리고 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더 나아가 영화를 찍는 기술이나 테크놀로지로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영화적 세계에 닿는다. 그러나 이 닿음은 또다시 날카로운 총성과 쓰러진 어머니의 시체위로 뿌려지는 물로 이반을 현실로 되돌려 보낸다.
세 번째 꿈은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이 영화속에서 가장 의도적이며 아름답게 처리한 시퀀스일 것이다. 이 꿈은 앞의 꿈들과 달리 과거로부터 환기된 것이 아니며, 기억일 수도 있고 또한 그 반대일 수도 있는 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전에 회의 책상에서 이반은 그만 깜빡 잠이 든다. 두 개의 꿈이 이반에게서 시작한다면, 이 꿈은 마치 독립된 에피소드처럼 달려오는 마차로부터 시작한다. 그 마차에는 사과가 가득 실려 있고, 그 뒤에 이반과 소녀가 타고 있다. 하늘에서는 번개가 번쩍거리며(천둥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비가 쏟아진다. 이 비는 하얀색이다. 번개가 치는 순간 배경은 정상적인 필름(포지티브)에서 뒤집힌 필름(네가티브)으로 바뀐다. 이 비현실적인 공간을 연결하는 것은 소녀의 표정이다. 세 번 연속되는 소녀의 얼굴은 이 장면이 비와 표정, 사과를 싣고 달리는 마차의 이동 속에서 그 어디론가 가는 예감, 그 예감의 불안에 관해 해변가로 이어진다.
해변가는 마지막 꿈의 무대가 된다. 이것은 꿈이라기보다는 좀더 정확하게 긴장감으로부터의 정지, 그래서 한층 인간적 도덕이 보장되는 세계에 대한 바람일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되찾은 도시에서 독일군이 남기고 간 파일을 뒤지던 중위는 사형당한 이반의 사진을 보게 된다. 이 소년의 죽음은 도데체 누구의 책임인가? 혼란스러운 중위 주변을 따라 무너져 내릴 듯 휘청거리는 촬영기는 문득 무표정한 이반을 본다. 그 이반은 다시 어머니를 만난다. 이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해변가에서 물을 마시고, 그는 소년들과 원을 그리고는 함께 뛰어논다. 꿈속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들을 이반은 죽어서 비로소 모두 만난다. 사과 마차의 소녀가 찾아 오고, 두 아이들은 달리고 말없이 웃는다. 아이들은 바다를 향해 달리고, 이반은 손을 내민다. 그러나 그가 잡은 것은 이미 죽어버린 나무다. 죽은 이 나무를 다시 살려내기까지는 그의 유작이 된 <희생>을 만들기까지 24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4. <안드레이 루블레프>, 역사와 임무 사이의 예술가
(I)
Q: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어떻게 해서 태어난 작품입니까?
A: 아주 간단합니다. 어느날 저녁 콘짤로프스키 그리고 또 한 친구와 책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그 한 친구가 말하더군요.
`그런데 왜 루블레프에 대한 영화를 안 만들지? 배우인 나로서는 정말 루블레프의 역할을 하고 싶은데.'
처음에 그 생각은 내게 비현실적으로 보였고, 게다가 내 세계와는 너무 멀리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나는 콘짤로프스키와 그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건 마치 골격을 짜는 일과 같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루블레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 그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II)
두번째 영화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만들기 까지는 4년을 기다려야 했다. 해외에서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문예정책 노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소련의 영화비평가들은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규정하였다.
<이반의 소년시절>을 찍는 동안에 타르코프스키는 두가지 문제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하나는 당국과의 마찰이었다. 이 영화의 촬영 장면들은 일일이 간섭받았으며, 특히 꿈 장면들은 의도적인 방해 속에서 다른 대안들을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정말 감독이 될 수 있는가라는 해답을 찾아야 했다. <이반의 소년시절>에서 실제로 연출의 원칙들은 일관성을 갖지 못했으며, VGIK 의 교육은 종종 그의 영화를 전통적인 소련영화의 맥락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그러나 <이반의 소년시절>은 완성되었으며, 이영화의 경험은 그를 반 에이젠슈타인 진영에 세워놓았다. 그는 장면화의 개념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섰는데, 영화의 실패는 전적으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세우는 거짓 도식에서 시작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장면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을 이어놓는 것(몽타주의 최고 단계)이 아니라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삶은 대화나 행동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의 진실성과 이것을 삶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시적 고리로서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감싸 안는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장면화가 하나의 세계라는 결론은, 이제 영화가 작가 사이에 맺어지는 그 연대감을 재단하는 것이 바로 세계에 대한 도덕과 동세대로서의 책임감이라는 비장한 선언이다. 이제 과학이 아닌 도덕으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책임지려는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결심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신비주의로, 자본주의 진영에게는 도피주의로 보였다. 그러나 장면화 그자체로 세계의 비극을 마주 안으려는 그 어떤 이론적 논지의 이데올로기로 차례로 봉인시킨 그의 영화는, 지금 다시 생각한다면, 모든 절망 뒤에 다시 희망을 전파하려는 엄숙한 순교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세계에 대한 감싸 안음으로서의 영화 예술이란 무엇인가? <안드레이 루블례프>는 그러한 타르코프스키 자신과 그 세대가 함께 힘을 모아 그야말로 일대사건으로서의 승부를 내건 영화다. 이것은 영화 그 자체 이상으로, 영화에 관한 철학, 예술에 관한 사상, 세계에 관한 예술가의 의무를 철저하리만큼 끈질기고, 영화사상 유례없는 깊이로 질문을 던지는 반성과 통찰의 도전이기도 하다.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만드는 과정은 타르코프스키와 그의 동료들에게 커다란 모험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15세기 러시아에 살았던 성상화가이다. 그는 타타르 족이 러시아를 침략하여 살륙을 벌이던 시대에 삼위일체의 성상을 그려낸 화가인데, 그의 동료들의 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어쩌면 루블례프라는 화가가 실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미술사적 견해까지 나올만큼, 그에 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는 15세기 러시아의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그리는 대신 15세기와 러시아, 안드레이를 분리하여 그들을 아홉개의 에피소드로 다시 나누었다. 이 나누어진 에피소드 중에서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주인공이지만 때로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에피소드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시간은 공간이 되고, 공간은 봉인된 시간이 되었다. 이제 영화사에서 지금까지의 영상이 공간-시간의 세계였던 것이 시간-공간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시간의 질서속에 들어온 공간은, 그 어떤 것으로 반복되지 않는(시간의 영구적인 차이/지연처럼 차례로 산종되는:자크 데리다) 움직이는 고리가 된다. 시간 속에서의 무한, 사라짐으로서의 움직임은 공간 속에서 무엇의 은유를 누구의 은유, 그 누구의 시선으로 바꿔놓는다. 그래서 그 공간에는 현전하는 부재라는 르네상스의 회화구도 대신 형상남기기의 주체 담화라는 효과공간으로 옮겨진다.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첫번째 에피소드는 안드레이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농부가 날개를 만들어 성당 위로 올라가서 뛰어내려 산산조각이 난다. 풍선처럼 바람을 넣은 커다란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농부는 성을 넘고 강을 건너, 초록지대에 말이 뛰는 곳까지 날아가 그만 떨어진다. 왜 날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을까? 이것은 잘못된 질문의 시작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그 대신 하나의 파국, 우리 곁에서 차에 치여 죽는 것과 같은 하나의 죽음을 거기서 본다. 그 어떤 상징으로부터 빠져나와 사건의 통일성 속에서 모자이크 되어 있는 사건을 박물관적인 해석으로부터 직접적인 삶의 관찰로 옮겨 놓는 에피소드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비밀이라고 타르코프스키는 생각한다. 형제애와 사랑, 화해의 믿음을 담은 성상을 그려내려는 화가 안드레이 루블레프가 수도원을 빠져나와 전쟁과 약탈, 민주의 축제와 예술의 박해, 침묵과 아버지 없는 장인의 아들에 관한 통과제의를 지나면서 삼위일체의 그림에 이르는 과정은 그 어떤 메타포, 그 유치하고 진부한 해석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전통적 진실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구체적 현실 없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란 상실된 믿음이라는 고유한 영역으로 되돌아오기는 하늘에서 대지로 곤두박질치는 에피소드 속에서, 관념에서 현실속으로, 결론에서 다시 출발점으로, 당신의 책 속에서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비상과 추락의 처음 이야기는 미리 주어진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전기를 다시 쓰게 만드는, 그의 말대로, 고유한 영역(자신의 동세대와의 연대)으로의 회복을 이어주는 끈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영화는 안드레이 루블레프가 안드로니코프 수도원을 떠나는 1406년부터 종만드는 소년을 만나는 1423년까지 다루고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수도원에서 함께 그림공부를 한 키릴, 다닐과 함께 비를 피해 들어간 오두막집에서 성직자들의 퇴폐를 풍자하는 방랑 광대를 만나는 에피소드다. 공식 문화의 공간에서 비공식 문화의 세계로 찾아온 안드레이는 욕지거리와 악담, 방언과 저주의 상소리 장르로서의 웃음의 예술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 하나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에 생겨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생겨난 인간과 세계를 갈라 놓는 중세적 신앙에 대한 질문이며, 또 하나는 중세의 수직적 세계관과 민중의 다층적 세계관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불일치다. 이 질문은 조화와 화해로서의 삼위일체를 그려야 하는 안드레이에게 이제 세상에 나와 안과 밖사이의 모순의 조화란 가능한 것인가를 묻는 시작이 된다. 이 풍자와 웃음은 키릴의 밀고에 의해 들이닥친 기마병의 체포로 끝나지만, 작은 오두막에서의 비밀스러운 민중들의 모임은 다섯번째 에피소드인 1408년의 축제에서 거대한 규모로 확장된다. 이 두개의 민중적 세계관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1405년 거장 데오판과의 만남과 1406년 벽면 앞에서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타르코프스키는 예술가란 자신의 시대와 세계에 관한 또 다른 인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민중의 대변자이며,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술가란 아무리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이 태어난 크로노토프적 세계로 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자기 속임수이며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도 자기 자신의 시대를, 원컨 원치 않컨, 그려내는 것이다. 질문은 그 다음부터다. 그려낸 세계가 역사의 법칙성을 따랐는가, 아니면 거기에 대해 모른체하고 눈을 감았는가를 통해, 예술가의 영혼이 도덕성의 원칙을 지키는지 아니면(의도적으로,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파기시키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406년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원칙에 대하여 끊임없이 망설인다. 이제까지 안드레이가 알고 있었던 예술은 원래부터 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며, 교육되어 강요된 것이다. 자신의 수도원 벽 저 멀리서 벌어지는 현실의 전망을 차당시켰던 두꺼운 벽 이면의 안드레이는 민중의 운명과 함께하기 위하여, 그래서 비로소 그의 소망인 삼위일체를 그려내기 위하여 다시 지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1408년 이교도들의 축제와 그 무시무시한 살륙이 벌어지고, 1408년 여름 최후의 심판이 이어진다. 이 심판에서 대영주가 자신과 경쟁 관계에 있는 동생에게 화가들이 더 좋은 그림을 그려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화가들의 눈을 베어버리는 끔찍한 장면을 본다. 축제에서 살륙으로 이어지는 8년간을 보며 이 영화의 1부가 끝난다.
타르코프스키에게서 안드레이 루블레프가 삶의 끔찍함을 관찰하여 얻는 진실은 결코 자신의 예술 작업의 창작 과정에서 오는 모순의 몫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는 그 자신이 처해 있는 피비린내 나는 현실로부터 받는 상처에서 물러나는 대신 그것을 경험해서 얻는 것이다. 안드레이에게 예술은 바로 자기 자신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임무의 현실로 부터 그 어딘가에 잠겨있을 삼위일체의 생명력을 들어올리는 종교적 사명과 같은 것이 된다.
제 2부는 1408년 타타르 족들이 러시아의 영주와 내통하여 블라지미르 시를 폐허로 만들고 모든 예술을 파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루블레프는 강간당할 뻔한 소녀를 구하고, 그녀를 범하려던 사내를 죽임으로써 예술가의 살해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안드레이는 침묵을 맹세하고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키릴도 3년간 이어지는 기아로 돌아온다. 여기서 백치의 소년만이 수도원에서 누가 더 예술가인지를 알아보며 키릴의 작품을 비웃는다.
루블레프의 침묵은 1423년까지 계속된다. 그는 여기서 보리스카라는 소년을 만난다. 그는 대공으로부터 외국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종을 주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종을 만드는 장인이었으나 이제 세상에 없고, 그래서 그 비밀을 전수받은 보리스카가 종 만드는 작업의 총책임자가 된다.
이 마지막 에피소드는 <안드레이 루블레프>에서 가장 핵심적인 동시에 의문스러운 질문을 감춰놓고 있다. 우선 이 에피소드는 몇 가지 점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작업이라기에는 의문을 갖게 한다. 여기서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보리스카의 작업을 지켜보는 관찰자이지만, 그러나 또한 종만드는 과정이 그 자신의 침묵에 대한 맹세를 깨트린다는 점에서, 역사의 외부에서 개인의 내부로 들어온다. 그러나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고리는 민중의 세계나 그 어떤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이라는 창작품, 집단노동의 산물에의 성공에서 오는 회의와 또 다른 질문이다. 이 종이 완성되기까지 보리스카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 친구들과 민중들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재촉한다. 그는 종이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으면서, 창작의 과정을 지배의 과정, 권력과 예술 사이에 맺어진 재생산의 구조로 뒤바꿔놓는다. 이제 집단노동의 가혹한 현장이 된 그곳에서 안드레이 루블레프에게 두 가지 질문이 던져진다. 그 하나는 "당신은 왜 침묵을 깨뜨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는가? 당신은 혹시 당신의 재능을 그냥 갖고 그냥 그대로 무덤에 묻히려는 것은 아닌가?"라는, 그의 적대자이자 루블레프에 대해 항상 시기를 일삼았던 성상화가 키릴의 질문이다. 이 질문은 새벽에 폐허처럼(<이반의 소년시절>에서의 풍경으로부터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놓여진 풍경속에서 던져진다. 일종으 르네상스적 폐허처럼 인공화된 풍경 속에서 키릴은 르네상스적 질문(그 이중의 되울림)을 던진다. 예술이 태어나서 발전하는 곳이 정신적이며 이상적인 영원한 동경이 가득찬 곳이라면, 그렇다면 정신적이며 이상적 예술의 주변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만드는 곳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곳에서 제시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개인적 가치가 파기한 것은 혹시 삶의 의미 그자체는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그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회의는 키릴과 자신을 둘러싼 안개 속에서 그 깊이를 더할 뿐이다. 그러나 이 회의가 전적으로 타르코프스키로부터 제시된 것인지 아니면 콘짤로프스키와 그의 동료들과의 작업을 통해서 루블레프로부터 생겨난 것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 회의가 영화 컨텍스트 내부에서 묻고 있는 또하나의 끈질긴 질문, 어용 예술가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가혹하리 만큼 가차없는, 하지만 그것이 권력 그 자체와 관계를 맺고 있기에 당 노선에 따른 모스 필름 스튜디오 내부에서 활동하는 소련 뉴 웨이브의 또 다른 딜레마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보리스카의 종 만들기에 대한 해석에 끊임없는 교란을 일으킨다. 보리스카가 아버지로부터 종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으며, 그의 권력(그리고 또한 예술 창작)은 거짓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권력이 물질적인 힘을 얻게 되고, 대공의 잔인한 정치적, 폭력적 권위를 통해서 종이라는 작품으로 구체화된다.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그 과정에서 촬영기에 의해 배제되어 있다. 촬영기의 시선은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관찰을 따르는 대신, 노동 전체의 과정이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이루어 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수직이동(변형이동을 제외한 수직이동만 네 차례)을 동원한다. 그러나 촬영기는 노동 그 자체의 편에 선 인간의 세계로부터 종이 땅에서 만들어져 하늘로 올라가는 수직적인 공간(그래서 후일 삼위일체의 회화라는,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려는 염원으로서의 회화)에 세워지는 것임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인간 대신 예술의 편에 선 촬영기? 타르코프스키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년의 거짓말과 삼위일체의 그림이 신의 세계를 구현한다는 신념이 모두 권력에 아부하는 어용 예술가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는 역사의 외부와 개인의 내부를 연결하는 고리로서의 예술에 권력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잡고 자신을 어용 예술가로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해, 촬영기와 노동 사이에 세워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연결선으로서의 장면화를 그려낸다.
종은 완성되고 사람들을 환호한다. 예술은 창조되었지만, 세계는 폐허로 둘러싸여있다. 촬영기는 수평으로 물러나고, 안드레이는 울고 있는 보리스카를 향해 걸어온다. 둘러싼 사람들이 물러나면, 보리스카는 나무를 붙들고 울고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버지는 비밀을 안고 무덤으로 들어갔어요."
이 거짓말을 고백하는 보리스카가 잡고 있는 것은 뿌리가 없어 자랄 수 없는, 그저 대지에 박혀있는 나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는 보리스카가 붙들고 있는 그 죽은 나무의 자리에 안드레이 루블레프가 앉아 보리스카를 감싸 안는다. 그것이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의지인지, 아니면 동세대 의식의 교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촬영기의 이동으로 불이 꺼진 장작더미를 보여주면, 이어서 완성된 삼위일체의 성상화가 색채화면으로 보인다.
이 색채화면은 오랜 싸움 끝에 얻어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색채화면을 가짜라고 생각한다. 색채는 느낌이 재현되는 것을 방해하며, 거기서 사실과 표상 사이에 패러독스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가 총천연색일지라도 흑백화면이 오히려 이 세계의 모습을 시적 진실에 더 가깝게 재현하며 시각성에 의존하는 영화의 심리적, 자연적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기나긴 작업 끝에 타르코프스키가 도달한 결론은 이 세계가 진실보다는 가짜에 더 가까운 것이며, 그 더 가까운 불안의 의식을 옮겨놓는 색채의 공간으로 옮겨 갈 결심을 하게 된다. 이제 타르코프스키는 삼위일체의 성상화를 그려야 하는 화가의 고뇌와 침묵의 수행을 계속하는 대신, 오히려 한 걸을 더 나아가 하늘과 땅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그 중세의 회화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임무를 계속한다.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말대로 예술 창조란 가장 비극적 의미에서 예술가에게 진정한 스스로의 임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에 덮여 있고, 또한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에 덮여 있다. 삶이 이 부조리한 모순 속에 얽혀 있다면, 이 모순은 예술 속에서 조화 되어있는 하나의 극, 하나의 드라마로서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 드라마로서의 가짜, 가짜로서의 불안의 의식 속에 들어간 다음 영화가 공상과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그 자신의 말처럼 모순의 조화일 것이다. 그러나 그 조화는 죽음으로 이르는 절망의 의지로 그 여행을 시작하는 미래의 묵시록으로 남게 되었다.
5. <솔라리스>: SF, 휴머니즘, 아버지
(I)
Q: <솔라리스>에서 주인공은 이미 죽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영화는 당신의 작품중에서 유일하게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A: 여기서 사랑의 이야기는 이 영화의 한 측면입니다. 아마도 솔라리스 혹성에서 주인공의 임무는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닐겁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솔라리스 혹성의 모든 특징은 사람의 휴머니티가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II)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1966년에 완성되었으나 당국에 의하여 5년간 개봉이 금지되었다. 특히 이 영화는 소련의 영화비평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에서 자연주의라는 것은 가혹한 비판을 의미하는데, <안드레이 루블레프>에서 수많은 장면들이 특히 문제시되었다. 짜르의 군대가 예술가들을 장님으로 만들고 형제간의 살륙을 담은 장면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 비난의 진짜 의미는 오히려 다른 이유에서였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당의 문예정책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역사 해석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뒤따랐다. 이 영화를 옹호한 것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었다. 그는 이 영화의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민중에 절망하는 오늘의 인텔리겐차'라고 변호하고 나섰는데, 이 평가는 오히려 더 거센 비난을 불러모았다. 특히 같은 해에 <전쟁과 평화>를 만든 세르게이 본다르추크는 "최근 이해할 수 없는 관념적인 사고로 영화를 만드는 위험한 부르주아적 태도가 소련에 만연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타르코프스키는 특히 엘리트 의식의 낡은 인텔리겐차적인 예술관을 소련 영화에 끌어들이고 있다"라고 당기관지 `소비에뜨꼬에 키노'에 기고하였다. 이것은 타르코프스키의 다음 영화 작업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은 1969년 칸느 영화제에 당시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요청으로 특별 출품되었고, 소련 당국의 비경쟁 출품 요구에도 불구하고 국제 비평가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방세계의 평론가들에게 발견될 기회를 놓쳤다. 1968년 5월 파리 혁명으로 상징되는 이 시기에 소련에서 온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시대의 반동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다음 작품은 몇번의 당국으로부터의 촬영 불가 끝에, 동구권의 SF 소설작가로 알려진 스타니슬라프 렘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솔라리스>로 결정되었다.
이 영화는 부당한 의미에서 자주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우주 오디세이>와 비교되었지만, 실제로 거의 아무런 유사점이 없으며 그 세계관도 다르다. 큐브릭의 영화가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뇌수를 다루고 있다면, 타르코프스키는 감정의 바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물질적 관념의 형태, 아마도 교조적 유물론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에 관한 여백의 의미를 뒤져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이라는 지식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공상이다. 그러나 이 공상은 꿈의 형태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상의 이미지 대신 기억의 물질을 끌여들여 그것을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 그 물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솔라리스>는 물 속 깊이 가라앉아 흔들리는 해초에서 시작한다.
크리스 켈빈은 과학자인데, 별장에 있는 그에게 연구소로부터 비디오 테이프가 전달된다. 연구소는 우주 스테이션이 보내온 비디오 테이프를 보며 혹성 솔라리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스테이션으로 크리스 켈빈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지구에서 우주 스테이션으로 파견되기까지가 영화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원작소설에 없는 전적인 타르코프스키의 창작이며, 구로자와 아키라가 `지구의 자연에 대한 향수를 영화 전편에 침투시키는 원시성'에 가득 차 있다고 부른, 의미심장한 재 창조다. 이 시퀀스 전체는 늦여름/초가을에 촬영되었는데, 이것은 타르코프스키 영화로서 예외적인 계절이다. 그의 모든 영화가 (<솔라리스>만을 제외하고) 초겨울/이른봄에 촬영된 것에 비해, 이 도입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질적 공간을 이룬다. 이 선택은 색채를 모티브로 하고있다. 유난히 연두색과 노란색으로 구성한 청색 톤의 화면은 영화 후반부의 우주 스테이션을 이루는 창백한 백색 계통의 청색과 대조를 이루며, 자연과 인공, 감정과 과학의 이항 대립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항 대립의 두개의 공간은 하나의 색채 속에서 물질화된 기억으로 단단히 묶이게 된다.
우주 스테이션에 온 켈빈은 여기에 남은 두 과학자를 만난다. 스나토우와 사르토리우스 두 사람이며, 물리학자 기바리안은 이미 자살한 후였다. 켈빈은 여기서 혹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에 대해서 듣게 된다. 혹성 솔라리스에 접근하면, 여기에 근접한 사람과 솔라리스가 상호 정신작용을 일으켜 상대방의 기억 저 깊이 잠겨있는 과거를 물질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질화된 기억은 상대방과 독립된 또하나의 대상이 되어, 이제 기억은 현실이 되고 그것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비유로서가 아닌 실제 존재하는 휴머니티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 켈빈에게는 그가 집을 나간 것에 충격을 받고 독극물 주사로 자살한 아내가 있었는데, 그 아내 하리가 그 앞에 물질/기억이 되어 나타난다. 기억 상실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것이 하리와 똑같은 하리가 생겨난 것이다. 기억은 고통으로 바뀌고, 켈빈은 하리를 모조 우주선으로 유인하여 스테이션 밖으로 날려보냈지만, 떠나보내자마자 또 한 명의 하리가 나타난다. 기억을 잊지 않는다면, 하리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나타난 하리를 켈빈은 아내로 인정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하리가 자신은 하리가 아니며,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일까라고 질문하며,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한다. 하리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질문은 켈빈의 고통을 이번에는 반대의 방법으로 물어본다.
이 비극은 우주에서 길을 잃고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지식을 얻게 되는 데서 시작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얻은 지식은 긴장과 불안, 고통과 결핍일 뿐이며 결코 진실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도덕 법칙과 모순에 빠지고, 여기서부터 양심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심의 존재에 관한 비극이다. 그래서 이 전체의 분위기는 멜로드라마의 구성을 갖는 대신, 고전적인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솔라리스>의 비극은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이다. 그 하나는 싸워야 할 세계관이 그 자신의 내부에 있음을 물질화된 존재로서의 양심을 통해 외부로부터 발견하고, 심지어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도 내쫓을 수 없다는 재현 주체가 바로 자신이라는 발견의 이중성이다. 또 하나는 그 싸움을 시작하는 장소가 공중에 떠있는 공간이어서, 중력의 법칙이 인공으로 만들어진 낯선 자리에 온 타르코프스키의 촬영기는 그 자신이 의존해야 할 하늘과 땅 사이의 그 어느곳도 아닌 시네마스코프의 프레임으로 확대된(<솔라리스>는 타르코프스키 첫번째 색채영화이자 마지막 시네마스코프 화면이다) 시선의 시간 질서 내로 편입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구에서의 영화적 질서가 조형적 재현 내부에 지도적 공간을 설정해 놓고 인물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면(특히 기후의 변화에 따른 인물과 촬영기 사이의 거리를 중심으로), 우주 스테이션에 들어서서 영화적 질서는 촬영기적 상상거리(쇼트 구성의 시점 원리)에 양보햐여 측정/보편으로서의 원근법적인 세계가 된다. 이 원근법은 공간적인 것이 아닌 촬영기의 시간적인 상상거리이며,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공간과는 상대적인 차이를 지니게 된다. 이 차이는 과학적인 공간에서 거듭 생성되는 비과학적인 존재에 대한 예정으로서의 운명이다. 그리고 켈빈의 탐색은 이제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야외에서 실내로 이동하는)기억의 끈을 따라가는 공중으로의 방향운동이 된다.
그러나 물질화된 기억과 그 끈의 도주선 사이의 고리는 또한 얼마나 끈질긴 것인가? 스나토우의 생일파티에서 토론에 뒤이어 도서실에서 켈빈과 하리는 30분간의 무중력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촛불이 허공에 뜨고, 시네마스코프의 긴 화면을 가로질러 책이 날아오른다. 이 부력의 이미지는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브뤼겔의 <눈속의 사냥꾼> 그림과 교차된다.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은 두개의 이미지, 수평이동과 수직상스의 교차 속에서 타르코프스키적인 영상을 만든다. 영상은 나눌 수도 없고 정리되지도 않으며 붙잡을 수도 없다. 다만 우리 의식에 의존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진짜 세계와 함께 태어난 접합/분절인 것이다. 만일 세계가 평형 상태를 만들고 있다면 영상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 균형은 질실과 인간 의식, 아마도 유클리드적 공간의 경계 내에 있는 기하학적 의식, 그 둘 사이의 상호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상호 관계를 타르코프스키는 다르게 해석한다. 그 관계를 구성하는 우주의 총체성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 대신 총체성에 대한 전모를 표현하기 위해, 그 사이에, 총체성과 진실의 그 사이에, 그것을 표현하는 시적 고리로서의 영상을 제시한다. 타르코프스키적인 영상이 갖는 영화사적인 혁명은, 지금까지 영화의 재현이 갖는 일회성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재현에 대한 치환, 그 일회성에 대한 유사/조웅의 일회성을 끈질기게 뒤바꾸어, 그 대신 그 자리에 놓음으로써 사실처럼 취급된 의식으로서(좀더 정확하게는 문제의 틀로서)의 일회성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것은 그런 의미에서 화면의 안/밖의 경계를 끊임없이 번갈아 뒤바꾸는 르느와르의 공간, 다중 플롯이 동시 진행되는 자크 타티의 스펙터클, 그 어떤 메타포도 제거해내 그 자체로서 부재가 되는 브레송의 데쿠파주에 이은 영화사적인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켈빈은 이 공중에 떠 있는 공간인 우주 스테이션을 떠날 결심을 하고 지구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이 말은 창문 앞에 놓인 화분과 거기에 심어진 꽃을 앞에 두고(생명과 폐쇄성) 이어진다. 영화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다. 호수는 얼어붙어 있고, 나무들은 가지만이 늘어서 있다. 켈빈은 집을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안을 들여다 본다. 그 안에 아버지가 보인다. 두 사람은 서로 창문 사이로 마주 본다. 아버지의 실내에, 감정을 담은 따뜻한 비가 내려 온 방안에 김이 서리기 시작한다. 걸어나온 아버지 앞에 켈빈은 무릎을 꿇고 감싸 안는다. 그 순간 촬영기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우리는 이 마지막 에필로그가 혹성 솔라리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야기하는 예상치 않은 마무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솔라리스>를 기점으로, 타르코프스키 영화 내부로 아버지가 돌아온다. 이제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집들은 아버지의 집이며, 그의 집이 아니다. 그러나 그 복귀는 행복한 것이 아니다. 타르코프스키는 다음 작품 <거울>에서 아버지의 집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그 집에 아버지는 끝내 부재하며, 그의 어머니와 그의 기억을 괴롭힌다.
6. <거울>, 역사 없는 연대기
(I)
Q: <거울>은 특히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흔히 개인적인 기억에 관한 영화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사실입니까?
A: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기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러시아 문화전통이라고 불려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 모두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러시아의 역사, 그것을 이루는 러시아의 모든 이들의 후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보지 못한 비판들은 이 영화에 대한 올바른 비평이 아닙니다. 여기서 그리려고 한 것은 바로 그 후회의 아래에 깔려 있는 진실에 대해서입니다.
(II)
<솔라리스>는 1972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과 국제에반젤리센터상을 받았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영화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으며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영국 방송 채널4에서 제작한 <Art of Tarkovsky> 프로그램에서 "<솔라리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생각도 하기 싫다"고 짧게 대답하고 있다.) 다만 <솔라리스>가 지나치게 공상과학의 요소에 사로잡혀 있는것, 그래서 스타니슬라프 렘의 소설 원작에 나오는 우주선과 우주정거장 같은(이 소설이 요구하는) 소재들에 과도하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자기 비판하고 있다.
이 비판은 그의 네번째 영화 <거울>을 통해서 두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 하나는 이제 그의 영화적 세계관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장면화와 서구적 모더니즘 영화감독들의 새로운 경향인 미장아빔에 일정한 경계를 두려는 일종의 자기 경고의 의미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경고를 통해서 역사 속의 인간으로부터 인간 속의 역사로 그 관계를 뒤바꾸어, 영화사 내부의 역사로부터 빠져 나와 영화 그 자체를 다른 방법으로 받아들이려는 의도적인 외부의 자리, 외재적인 그 곁에 선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1975년을 기점으로 <거울>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영화사의 서구적 전통에 대해 일종의 공백, 그 전체적 컨텍스트에 대한 부정을 통해 그 반대로 컨벤션으로서의 몽타주/장면화(에이젠슈타인/바쟁)의 유산이 가져온 경험적/역사적 결정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영화사에서 두번의 단절을 통해 얻어진 것인데, 그 첫번째 단절로서 공간-시간에 대한 상상적 차단이 오즈 야스지로에 의해 제기되었다면 두번째의 시간-공간에 대한 경계보충은 타르코프스키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서구적 전통에서의 영화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의 의심한다.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사랑한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다. 작업이 진전되고, 그래서 후일 해야 할 것들이 어떻게 영화작가 자신이 세워놓은 원칙에 부응할 것인가? 모든면에서 너무 많은 유혹이 있다. 진부한 틀, 선입관, 공통점,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의 예술적 이상. 장면을 아름답게 찍고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한 발자국만 옮긴다면 이미 패배한 것이다.
이것은 엄격한 비판이다. 이 비판은 어떤 의미에서 서구 영화 전체에 던지는 질문이며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개되는 현대 예술에 대한 늦추어질 수 없는 비판의 화살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서구 영화사의 분기점, 고다르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 그는 <네 멋대로 해라,1959> 에 대해서 형식을 통해서 자기 문제에 도달한,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는 반대되는 유형의 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다르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는 심각한 위험이 그러한 영화 사고에는 항상 내재해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고다르라는 이름을 내세운 1960년대 이후 서구 영화의 모더니즘 전통은 타르코프스키가 보기에 소시민적 결론인 것이다. 그는, 실험 대신 탐색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표현은 작가의 무기력과 내적인 공허, 창조 의식의 결여와 자만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실험정신이라는 말을 만들어 대규모의 `탐색'영화(그런데 무엇에 대한?)를 재생산하는 배급구조를 만들어 놓는 앵무새가 된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제 현대 예술이란 허구가 되었으며 방법이 목적이자 의미가 된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단호히 그 전통으로부터 외부로 나왔다.
그렇다면 그 외부에서 다시 영화로 들어가는 입구는 어디인가? 타르코프스키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근본 이념은 실제 형식과 그 어떤것이 아닌 명중한 표시, 바로 삶의 물질성 속에 자리잡아 경계 속에 각인 되어있는 시간때문이다. 관념이나 숫자가 아닌 삶의 물질성을 잡아 놓는 그 시간 속에서 세워진 세계관만이 감독과 관객, 예술을 창조하는 이와 그것을 향유하는 이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결 출구로서 각인되어 있는 시간은 그는 <거울> 속에서 찾아나서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수많은 작업과정을 통해서 그의 영화중에서 가장 개인적이면서 또한 (타르코프스키의 맥락에서) 가장 이론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울>은 어떤 유형의 해석도 불가능한, 영화사의 하나의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건 마치 스핑크스처럼 버티고 서서 거듭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의 가장 불가사의한 질문은, 여기에 담겨진 모자이크의 수사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발견하기는 쉬우나 도대체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거울>을 시스템 외부에 있으면서 또한 외부로부터 사고하여 시스템에 침범하게 만든다. <거울>은 바로 두개의 공간, 그 영상의 직접화법과 간접화법 사이에서 세워진 공간의 체험을 상실하게 만드는 침범행위의 영화사적인 혁명적 선언에 해당한다.
<거울>의 원작은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1970년 소련 영화 비평지 <이스꾸스트보 키노>6월호에 발표한 단편이다. <하얗고 하얀날>이라는 이 글을 쓴이유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결심한 때문이며, 영화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5년 후 이 소설을 다시 영화화 할 결심을 하면서 예상치 않은 혼란에 빠졌다. 영화가 (그대로 옮기면) 진부한 추억의 서정적인 향수에 빠지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나리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울>은 두개의 시간,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화자의 시간과 그의 어머니의 시간(변형되고 주관적인 시간) 속에서, 그 둘을 형식적이고 사변적인 대결로 이끄는 몽타주 사이에 역사의 특정시간을 보도하기 위해 찍은 뉴스릴의 시간(기록이고 정확한 실제의 시간)이 그 여백을 차지한다. 이 메우기로서의 여백은 보충이나 주석이 아니다. <거울>에서 기억의 시간과 기록의 시간이 모자이크처럼 얽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연속으로서의 시간이다.
<거울>은 또한 작업 과정도 시간의 진행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미리 구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실제로 영화촬영에 들어가기까지도, 장면이나 에피소드를 어떻게 구성하겠다는 그 어떤 작업도 일체 현장까지 미뤄 놓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을때, 그의 오랜 동료였던(그의 이전 작품 모두를 찍은)바딤 유소프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자서전 취향' 이라는 이유로 이 영화의 촬영을 거절하였다. 새로 작업하게 된 게오르기 레베르그와 팀의 정신적 관계가 현장에서 문제되었다. 특히 위기의 순간에 촬영기사와 의견이 엇갈리면 완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속수무책이었고, 촬영은 며칠 씩 중단되었다. 이미 예정했던 촬영기간이 지났고, 필름이 겨우 400미터(상영시간으로 약13분)밖에 남지 않았을때,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화자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것이며, 그래서 화자(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낡은 집이 주제가 되고, 이를 중심으로 오가는 40년이 영화의 이야기가 되었다. 모든것은 예상치 않게 끝났고, <거울>은 고다르와 똑같은 방법으로 시작해서 정반대로 끝난 유일한 예가 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 편집이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를 열아홉 번에 결쳐 재편집하였다. 그것도 부분적인 아닌, 전체를 매번 새로운 관점으로 편집하여 열아홉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최종판이 결정되었다. 그는 여기서 단 하나의 원칙, 시간은 각인시키는 출구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거울>은 한 소년이 말 더듬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서 교정받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언어장애라는 이 특별한 현상은 언어와 사고의 분리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타프코프스키는 그 사이에 자리잡은 시간의 공백을 하나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란 우리의 일인칭 주어 `나'의 존재에 대한 조건이다.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 때 파괴되는 일종의 문화적 매개체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상태로서의 시간은 기억과 서로 열려 있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의 기억은 알렝 레네의 시간과 다르다. 그는 플래쉬 백의 시간적 질서를 따라가지 않는다. 레네의 시간은 과거시제로서의 플래쉬 백을 통해 장면과 장면 사이에 역사가 내재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시간 그 자체를 잡으려고 한다. 그는 화면에 담긴 시간을 통해 장면을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시간과 시간의 병렬/충돌 대신에, 자신의 영화 속에 들어 있는 시간을 부분으로 나누어 차례로 배제시키고 들어내어 영화 그 자체의 컨텍스트에 따른 시간의 질서로 바꾸어 놓는다. 타프코프스키는 시간을 조각하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심지어 그런 정의는 악명높은 편견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절충주의적 방법을 택하지 않기 위해서 영화의 법칙은 시간의 움직임과 시간의 조직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거울>은 그런 의미에서 연대기다. 그리고 타프코프스키도 연대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영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 연대기는, 영화를 어떻게 찍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재구성, 재창조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방법, 하나의 출구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영화에 관한 새로운 사고에 도달한다. 만일 영화를 연대기로 나눈다면, 시간은 하나의 사실이라는 형식이 된다. 이 사실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관찰의 형식속에 재현되는 것이며, 바로 관찰을 통해서 영화의 형식에, 삶의 물질성에 뿌리를 두고 시적 영화라는 예외 없는 상징이나 비유에 다가가는 위험성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울>은 주인공과 어머니,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기억, 인터뷰와 뉴스릴의 복잡한 시간 구성에도 불구하고 영상과 시간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오랜 관념으로서의 몽타주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영상 속에 내재한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자연적 시간의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심지어 시간에 따라 영상은 하나의 관찰이 된다. 물론 타르코프스키도 이러한 전제조건에서 한 발만 양보하면 인접 예술 장르들의 수많은 미학적 조건과 유리한 예술사적 전통속에 들어가 영화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대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제 영화 작업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며, 영화와 유사한 그 어떤 자리에 놓이는 상형문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라는 그 자체의 발전의 역사와 영화의 본질, 그 가능성에 모순되는 것이며, 이제 그 어디에선가 본 상투성이 되는 것이다. <거울>은 그런 의미에서, 영화 자체의 텍스트(시네아스트의 네러티브)와 영화 외부의 컨텍스트(영화사의 메타 내러티브) 그 어느 사이에 선 시간-공간 이다.
이 영화는 1935년 시골이 할아버지 집에서 어머니와 주인공(화자), 그의 여동생이 아버지를 기다리며 보낸 여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은 아니다. 오히려 화자의 시 낭독과 회상 그리고 영화는 이 이야기를 끊임없이 탈중심화하는 모티브의 해체를 통해 나누어진다. 1935년의 외부에는, 영화 내부에도, 1934년 소련의 성층권 비행과 스페인전쟁, 제 2차 세계대전고 소련군의 시바쉬 강 횡단, 중국의 문화혁명 뉴스릴이 자리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오히려 영화의 픽션부분보다 다큐멘터리 뉴스릴 장면을 선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 뉴스릴에 담긴 비인간적인 운명의 비극적 군인들, 그 희생자들이 오히려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건, 이 영화는 픽션에 대한 보충으로서의 뉴스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뉴스릴에 대한 시간의 재질서로서의 픽션에 관한 하나의 역사, 더 정확하게는 관찰이다. 역사의 기록 주변에는 개인의 사건이 자리한다. 1935년 연초장에서 일어난 화재, 인쇄교정공으로 일하는 어머니가 혹시 오자를 놓치지 않았을까라는 불안으로 공장으로 달려가던 날, 주인공(화자)의 교련 훈련, 이웃 마을에 가서 닭 도살을 하던 저녁이 이어진다.
이 역사적/개인적 사건들은, 마치 일상의 기적처럼,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실제로 서구의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보고 끊임없이 감춰진 상징과 의도, 비밀을 찾아내려 했으며, 타르코프스키는 바로 그러한 태도에 실망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에 겉으로 드러난 것 말고 또 다른 숨겨진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반복하였으나, 오히려 비평가들의 불신과 실망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점에서 <거울>만큼 타르코프스키와 비평가들의 거리를 벌려 놓은 영화도 없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거울>에 대해 반대의 제안을 한다. 이 영화는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갖는 감정, 그들과 타르코프스키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그들을 위한 영원한 동정과 동감에 관하여,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무력함과 그들에 대한 그치지않는 죄의식에 관해서 이야기한 영화의 서정적 감정, 그 감정의 주인공에 대해 세밀한 부분까지 끈질기게 회상하는 불안의 이야기를, 이해하지말고 말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이 불신과 실망의 혼란은 부분적으로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의도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심지어 <거울>에서 조차도 자신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지지 못하고 타협한 부분이 있다고 자기비판하고있다. 그 중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닭을 도살하는 장면의 의도적인 연출은 그 의도성 때문에(슬로모션) 문학적이 되었으며, 바로 그런 점에서 배우의 얼굴 표정 대신 감독의 연출의도만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영하에서의 의도적인 경향성과 이데올로기에 따른 영상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에 다름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화의 교조주의는 영화감독이 관객에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리고, 만들려는 화면의 장면화를 구석구석까지 보여주려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이상적 실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부른다. 오히려 영화화면위에 관찰한 삶을 재생산시키고, 그 재생산된 삶의 물질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힘은 그 반대로 연출의 의도를 모를 때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오히려 그 사건을 정서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거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와 시간/역사, 그 사이를 감싸는 전통/문화라고 부른다. 그것만이 이 영화를 열 수 있는 열쇠인 것이다. 바하와 페르고레시, 프쉬킨의 편지, 시바쉬 강을 건너는 군인들 그리고 개인적인 가정속의 사건들,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가치를 갖는 감정이라는 것을 전달하려고 한다. 한 인간이 어제 저녁에 부딪힌 그 문제가 바로 수세기 전부터 인류가 가졌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하나의 연결고리, 그 뿌리 내리기의 대지 내부 사이로 이어져 있는 거대한 공동체 운명인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그 중에서도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적 문화전통을 이야기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이래 예술가들의 임무가 된 정신적 위기에 대한 임무와 그 두려움이야말로 이제 좀더 분명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뉴스릴의 자료화면과 꿈, 현실로 나타난 현상들, 희망과 예감은 모두 주인공(화자)으로 하여금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마주해야만 한다.
이 마주침은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그런 경로를 통해서 서구 영화의 모더니즘적 전통 외부에서 그 자신의 출구로 빠져나온 것이다. 그러나 <거울>을 거쳐 빠져 나온 입구에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정신적 위기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르코프스키는 <거울>을 끝내고 영화를 포기할 생각까지 가졌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를 보고 감동받는 관객이 있다며, 그런 과격한 결론을 내릴 권리가 감독에게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관객을 위해서, 자신의 영화를 필요로 하는 관객들을 위하여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작업을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잔인하리만큼 자신에게 엄격한 책임감. 그래서 이제 정신적 위기라는 출구앞에서 봉쇄된 도피구를 뒤로 하고, 그는 마지막 10년을 시작한다. 망명과 향수, 고통과 암 선고가 뒤따른 시간이었지만, 그가 만든 <안내자>와 <향수>, 그리고 <희생>은 영화 예술의 순교자 타르코프스키가 인류의 정신적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남겨 놓은 삼위일체가 되었다.
7. 봉인된 삼위일체 <안내자>, <향수>, <희생>
(I)
Q: 지금 당신이 흥미를 갖는 특별한 주제가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말하자면 지금 어떤 영화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A: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화 장사꾼들이 자신들이 제작한 영화를 팔기 위해 만들어낸 질문입니다. 오히려 내게 영화는 하나의 별처럼 보입니다. 주변과 단절되는 그 충격과 그 어딘가에 입구가 있으리라는 희망 사이에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건 영화를 예술이라고 믿는 감독이라면, 그래서 그 시작은 하나의 강박관념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그것에 관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불안이 없다면 그려낼 이야기가 없으며, 희망이 없다면 형식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II)
<거울>은 1975년에 완성되어 재난을 맞이하였다. 이것은 소련 영화평론가들에게 속임수처럼 보였고, 당국으로부터 반동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잡지에는 `더럽고 불쾌한 영화'라는 기사가 실렸고, 관객들로부터 적지 않은 비난의 편지를 받았다. 타르코프스키의 다음 영화는 다시 모스필름으로부터 간섭을 받게 되었고, 다음 영화인 <안내자>는 1977년 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 영화는 1년만에 촬영이 끝났으나, 현상소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완전히 다시 촬영되었다. 이 불행은 어떤 의미에서 <안내자>를 당국의 간섭으로부터 다소 풀어주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소련에서 유명한 SF 작가인 아르까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이며, 더구나 각본도 원작자들 자신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재촬영 과정을 통해서 <안내자>는 전적으로 재구성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저주를 통하여 구원 받은 셈이다.
<안내자>는 1980년 칸느영화제 특별참가작으로 선정되어 `경이의 영화'부문 대상을 받았다. 이 상을 수상하기 위해 칸느에 온 타르코프스키는 두명의 시네아스트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한 사람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였고, 또 한 사람은 페데리코 펠리니였다. 이 두 사람은 타르코프스키에게 호의를 표명했고, 이탈리아의 제작자 주세페 란치를 소개하였다. <거울>이후 소련에서의 창작 활동이 봉쇄되거나 거의 금지된 상태의 타르코프스키는 <안내자>의 수상이 또한 본국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그의 다음 영화 <향수>를 준비하였다.
<향수>는 1982년 2월에 촬영이 시작되어 가을에 완성되었다. 또한 그 해 12월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극장에서 <보리스 고드노프>의 무대극 연출을 맡았다. 1983년 3월에는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그의 소련 영화 회고전이 열렸으며, 5월 칸느영화제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돈>과 함께 <향수>는 창조대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또한 국제 비평가 대상과 기술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 수상은 서구 영화 비평가들 사이에 타르코프스키 르네상스를 가져왔으며,이 시기에 수많은 인터뷰와 초청강연이 열렸다.
1984년 7월 10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타르코프스키는 기자 회견을 통하여 망명 선언을 했으며, 소련당국은 입국 금지를 결정하였다.
그 해 타르코프스키는 잉마르 베르히만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전적인 호의로 베르히만의 별장이 있는 스웨덴에서 소설 <희생>을 쓸 수 있었다. 이 소설은 1985년 5월 부터 영화작업에 들어가 이듬해 2월에 끝났다. 그리고 5월 칸느에서 전대미문의 수상, 국제영화심사위원회특별상, 국제영화비평가상, 기술대상, 예술특별공헌상 등 4개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비평가들과 영화 저널리즘은 그랑프리를 수상해야 정당했으며, 롤랑조페의 <미션>의 수상을 제작자 데이비드 퍼트냄의 속임수라고 일제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는 다음작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을 준비하던 중 10월 18일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간암이라고 발표했고, 다음 영화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병석에 누운 타르코프스키는 12월 21일 그 자신의 영화론을 쓴 <시간의 조각> 마지막 장을 인터뷰를 통해 집필하였고, 12월 28일(에서 29일로 넘어간 자정)에 파리의 병원에서 숨졌다. 그의 나이 54세.
1987년 1월 5일, 파리의 성 알렉상드로 네프스키 사원에서 장례식이 있었고, 여기에는 그가 생전에 존경했던 로베르 브레송도 애도의 뜻으로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III)
소련에서 완성한 <안내자>와 망명이후 찍은 <향수>와 <희생>은 그의 영화에서 3부작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연작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하나의 주제에 대한 변주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컨텍스트라면 이 세편의 영화는 이질적이며 또한 전혀 다른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거울>이후 타르코프스키를 봉쇄한 상황에서 나온 일정한 경향은 그로 하여금 깊은 이야기를 다르게, 그러나 거듭 이야기하게 만든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비극이 결코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으로 자유로운 상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유를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가? 그는 거듭 생각해도 자유는 이기주의 속에 있는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자유란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무엇인가 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타르코프스키의 주인공들은 임무를 갖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절망에서 시작한다.
<안내자>의 시작은 <거울>의 마지막 결론에서 다시 출발한다. 정신적 위기는 이제, 그가 막연히 느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의 영화에 대한 하나의 믿음이 된다. 삶의 부조화와 영혼의 조화라는 모순 사이에서 인간이 갖는 고통과 희망이란 무엇인가?
<안내자>는 어쩌면 그런 공간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안내자는 금지구역이라고 알려진 미지의 장소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이 금지구역은 운석이 떨어진 지역인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출입을 금지시킨다. 그러나 그 금지구역의 끝에는 인간의 모든 소망을 들어준다는 희망의 방이 있다. 그래서 이제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바로 그런 사람들을 희망의 방까지 인도하는 일을 이 안내자가 맡고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안내자>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시간과 공간,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의 통일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체 작품이 단 하나의 쇼트로 찍혀진 듯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161분 상영시간에 145쇼트, 일반적으로 90분 상영에 750 쇼트 전후로 구성된다.) 이 원칙은 순간적인 것,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을 잡으려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상 이후의 서구 영화적 전통에는 낯선 것이 되었다. 그는 오히려 조화의 세계, 얽히고 서로 겹치게 되어 생겨나는 집중, 그 집중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분위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희망의 방은 그런 의미에서 공간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분위기인 것이다. 이 공간은 국가체제나 정치적인 메타포로서의 금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구역, 그래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 공간은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며, 한번 지나간 길은 다시 지나갈 수 없는 곳이다. 안내자가 뚫고 지나가는 공간은 기억과 상상 사이의 그 어딘가에 놓여있는 시간이다. 눈으로 보이고 시선속에 있으며 물질화되어 있는 이 시간 속에서조차 희망과 절망, 불행과 행복은 어느 것인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안내자>의 공간은 외부와 내부, 풍경과 실내, 금지구역의 이편과 저편 사이를 오가며 어느 쪽이 희망의 방인가를 질문한다. 안내자가 그의 아내와 불구인 딸과 함께 자는 침실인가, 아니면 과학자와 문학가가 함께 결코 멈춰 서서는 안되며 되돌아갈수도 없는 금지구역인가를 묻는다. 주어진 임무는 수행되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소명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향수>의 공간은 타르코프스키에게 낯선 곳으로 옮겨진다. 타르코프스키는 처음으로 러시아에서 역사와 문화가 다른 이탈리아로 옮겨와서 작업한다. 이제 <안내자>에서 찾아가던 금지구역은, <향수>에서 그 반대로 출발점이 된다.
시인 고르차코프는 18세기에 러시아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이탈리아에 유학을 왔던 작곡가 빠벨 소스노프스키의 자료를 모으기 위해 그가 머물던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에 온다. 소스노프스키는 유학을 마치고 향수에 시달리다가, 결국 다시 귀국하여 노예가 되고 그리곡 자살한다. 고르차코프는 여기서 자신이 들어선 낯선 공간과 고향의 기억을 끊임없이 연결짓는다. 토스카나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어머니들이 기도하면 임신을 하게 해준다는, 출산의 기적을 약속해주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그리고 이 성모 마리아의 성당 주변은 온천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출산의 암시는 고르차코프를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끌고 간다. 기적을 낳는 곳에서, 그는 불행을 끌어내온다. 미래를 약속하는 곳에서, 그는 과거에 매달린다. 출산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보장을 해주지 않고, 고르차코프의 공간은 둘로 나뉘어 분할된다. 이 두 개의 세계는, <향수>에서 경험한 시간-공간과 기록되어 남겨진 공간-시간(그 가역성의 얽히고 겹침의 분위기)으로 다시 세워진다.
<안내자>와 <향수>에서 시간은 탈구축된다. 그 철저하리만큼 끈질기고 갑작스러운 재분배속에서 이제 타르코프스키가 목표로 하는 것은 성서적 공간이다. 그것도 관념이나 비유로서가 아니라, 폐허화된 인공세트에 세워진 세계에서 르네상스가 세워놓은 말과 사물의 공존을 분리 시키고, 16세기적 공간의 질서를 그 명목으로부터 말씀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제 이 공간을 움직이는 힘은 코기토가 아니라, 생성에서 부활까지 이르는 하나의 원형으로서의 시간이다.
이 공간은 <희생>에서 좀더 분명해 보인다. 스웨덴 남쪽 발트 해에 자리잡은 고틀란드 섬에는 은퇴한 노배웅 알렉산드르가 그의 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해안가에서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며, 이 나무가 살아나리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간다. 이 섬에 지어진 집은 바다로 나뉜 대지와 하늘을 수직으로 연결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세워진 집, 그 곁에 심어진 죽은 나무는 생성과 부활을 동시에 보여준다. 가족과 생명, 삶과 죽음, 개인과 우주가 하늘과 땅 사이에 나란히 바다를 배경으로(물의 친화력에 따른 합치기와 되찾기) 놓여진다.
그러나 이 공간들은 공통된 불안에 시달린다. 제 3차 세계대전에 대한 공포는 이 공간들을 위협한다. <안내자>에서의 과학자, <향수>의 도메니꼬, <희생>의 알렉산드르는 전쟁을 무서워하며, 이 공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공포는 이미 그들 앞에 있다. <안내자>의 금지구역은 이미 전쟁이 끝난 폐허를 보여주고 있으며, <향수>에는 메마른 온천장이 다루어진다. <희생>은 그 생성/부활 사이에 개재한 낮부터 아침사이의 시간에 제 3차 세계대전을 알리는 폭격기의 소리(그리고 우유를 담은 유리병의 깨어짐)와 악몽의 공간을 차례로 세번에 나누어 보여준다.
이제 우연히도, 또한 필연적으로, 사랑과 믿음의 삼위일체라는 신념은 제 3차 세계대전의 셋이라는 숫자와 겹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숫자로서의 셋은, 그래서 믿음과 절망, 용서와 배신, 불행과 구원을 가늠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는 이 세개의 숫자를 정지되어 있고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개의 숫자에 담은 인류사적인 비밀, 파멸과 믿음의 가늠을 인간들의 손에 맡긴다. 그것은 타르코프스키의 신념이기도 할 것이다.
<안내자>에서 금지구역으로 여행하는 사람은 세 사람이다. 안내자와 과학자 그리고 문학가다. 과학자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라고 말하고, 문학가는 잃어버린 영감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이 세 사람이 금지구역 내부에서 삼위일체를 이룬다면, 그 외부에서 안내자와 아내와 그 불구의 딸이 가족으로서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금지 구역은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실외에서 내부로, 야외에서 방으로 옮겨간다.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장애물이다. 그들의 생각이, 그들 사이의 불화가 그들을 가로막고 이리저리 낯선 방향으로 이끌어 희망의 방으로 가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여행 목적지인 희망의 방에 이르렀을 때 정말 그 문턱을 넘어서야 할 것인지 망설인다. 그들은 희망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과학자는 이 금지구역을 파괴하기 위해서 온것이고, 문학가는 이미 오래전에 소설에 대한 영감 따위는 믿지 않았다고 고백한 직후에 희망의 방에 그들은 갑자기 도착한 것이다. 내적인 도덕적 상태가 붕괴된 자신들이, 바로 그들 자신의 내부인 희망의 방에 들어서서 그 희망을 소망할 수 있는지 망설이는 것이다.
이 금지구역은 시점의 역전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다. 이 세 사람은 희망의 방 문턱에 주저앉아 저쪽에서 이쪽(화면이라는 격자가 갖는 방향공간)을 본다. 촬영기가 이쪽에서 뒤로 물러나면 그 공간은 화면에 또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놓는다. 두개의 공간이 생기면 이 낯선 거리감을 통해 하늘과 땅을 만들어 낸다. 위는 보이지 않고, 아래는 물로 가득차 있다. 거기에 비가 내린다. 영화는 다시 늙음으로 돌아가 선술집이 나온다. 이 장면은 반복되지만, 이 광경이 희망의 방에서 바라보는 시간-공간인지 아니면 이야기로부터 되돌아온 공간인지가 분명치 않다. 이 선술집에 그의 아내가 찾아오고 안내자와 함께 나간다. 타르코프스키는 안내자의 아내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녀의 사랑에 대해 기적을 보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문학가와 과학자는 소망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이 시선의 역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불구 소녀에 관한 마지막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그녀는 책을 읽고(성경?) 텅 빈 책상(금지구역)에 놓여진 세개의 컵을 바라본다. 그 시선만으로 컵이 움직인다. 이 움직임, 정지하지 않는 공간이 문학가와 과학자에게 질문처럼 던져진다. 이 이야기의 구조는 시선의 내부로 이중 삼중으로 다시 얽혀있어서 처음에는 시선 없는 반복공간처럼 보이지만, 이제 주체의 시선 대신 자아의 시선으로 옮기면 이 구도는 영화 화면의 봉합사이에 세워지는 주관/객관적 관계가 재현/표상의 문제와 반드시 연관지어 만들어내는 내러티브 공간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세 사람은 <향수>에서 소설가 고르차코프와 통역자, 광인 도메니꼬로 반복된다. <안내자>에서 문학가와 과학자를 이끌고 금지구역으로 들어가는 안내자가 그 세계를 만들어냈다면, <향수>에서는 문학가가 만들어낸 세계(기억과 과거)와 광인이 말하는 세계(미래) 사이에서 통역자는 그 둘 사이의 그 어딘가에 있을 뿐이다. 흥미 있는 것은, 문학가가 등장하여 동일한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부재하는 것을 찾는 점에서 두 영화는 동일한 소재의 반복이다. 그러나 <안내자>가 미래에 관한 그 부재를 찾는다면, <향수>는 과거에 관한 부재를 찾는다.
도메니꼬는 자신의 이기주의가, 세계의 멸망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구하면 된다는 생각이 틀렸기 때문에, 그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로마로 간다고 고르차코프에게 말한다. 그리고 로마와 이곳 온천장에서 동시에 불이 켜지면 세상은 구워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두개의 부활의 공간은 역사로부터 메마른 곳임을 보여준다. 도메니꼬가 세상에 알리기 위해 도착한 르네상스(부활)의 도시 로마에는 그의 진실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그리고 고르차코프가 머무는 토스카나는 지금 출산의 기적을 이룬다는 온천(생성)이 메마른다. 두개의 공간을 연결할 것은 무엇인가? 타르코프스키는 그 메마름을 통해 그 건조함 속에서 스스로를 태우는 희생, 그 속에서 분신을 생각한다. 광인 도메니꼬는 그 자신을 태우고, 시인 고르차코프는 촛불을 들고 메마른 온천장을 가로지른다.
<희생>에서 이 불길은 육체적 분신에서 내부적 분신으로 옮겨간다. 여기서는 무대연출가 알렉산드르와 그의 손자 사이에 있는, 그 둘 사이의 또 한 사람이 이 영화에서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거듭 던진다. 그 둘 사이의 가족은 마치 낯선 세계의 방문객처럼 보인다. 친구인 의사 빅토르와 우편배달부 오토가 찾아오지만, 알렉산드르의 희생의지(미래에 대한 묵시록적 비젼)에 비해서 그들의 생일 선물은 전통적이며 역사적이다. 한 사람, 하녀이자 마녀인 마리아가 남는다. 그녀와 함께 사랑하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오토의 말에 따라 잠자리를 같이 하지만, 알렉산드르는 이제 그가 가진 것을 태우고 영원히 침묵할 것을 결심한다. 그 결심은 벙어리였던 손자의 입을 열어준다. <희생>에서 마지막 한 사람은, 적어도 의사(생명)와 우편 배달부(말씀) 그리고 마녀(기적) 그 사이에 서 있는 창조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상투적인 기독교적 구원으로서가 아닌, 그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절실하게 다룬다.
타르코프스키는 이제 그 시간-공간과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의 세계를 세운다. 그의 촬영기가 갖는 독특한 움직임은 그 운동과 스타일의 결합에서 땅을 물과 어떻게 연결시키는가로 옮겨진다.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우주의 질서를 세우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그 의지를 보고싶어 한다. 그가 다루는 관찰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삶의 물질성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얻게 된다.
<안내자>에서 금지구역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타르코프스키는 말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단 하나, 금지구역은 금지구역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것은 삶이며, 그래서 우회해가거나 아니면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영혼 내부의 영원한 것과 인간적인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의 공간은 하나의 시련을 겪는 지나칠 수 없는 시험이 된다.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의 공간은 물어본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그 사랑은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그의 영화 속의 공간은 그 이후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제 전쟁으로 폐허가 된(르네상스적 폐허?) 공간에는 남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 나머지의 여백을 타르코프스키는 물 속에서 본다. <안내자>에서는 물에 잠겨 있는 어항과 동전과 성 요한 초상화(생성에서 부활까지)를 발견한다. <향수>에서는 성경과 시집을 찾아내고, <희생>에서는 양동이의 물속에서 생명을 찾아내어 죽은 나무에 붓는다. <이반의 소년시절>이후, 타르코프스키 영화에서 반복되어 온 물의 이미지는 그 물이 무엇을 상징하느냐가 아니라 연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옳다. 그 물은 상징으로 나타나지 않는 대신, 물에 의해 화면을 이루는 장치가 변한다. 이 영화 장치가 가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와 장면화가 흔히 그 대가로 치르는 관념성을 타르코프스키는 물을 통해 자신의 질서 내로 옮겨 놓는다. 그는 자신의 촬영기가 세워놓은 위(하늘)와 아래(땅) 사이를 이어 놓기 위해 물에 의존한다. 그에게서 비는 하늘의 물이며, 중력 법칙에 따라 내리는 이 운동을 통해 대지로서의 어머니의 물과 하늘로서의 아버지의 물을 하나로 만든다. 그 두개의 물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어떻게 그의 세계속에서 가족을 그 중심으로 끌여들여 그의 외부의 세계를 다시 감싸 안을 것인가? 그의 영화 이미지가 갖는 삼위일체는 그래서 하늘과 땅과 촬영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타르코프스키 그리고 그 셋을 삼위일체로 만드는 비를 통하여 하나가 된다.
<안내자>에서, 안내자와 그 가족과의 화해는 희망의 방 문턱에서 불가사의한 비가 내린 후에 이루어진다. 또 <향수>에서 고르차코프는 호텔방에서 창문너머 내리는 비를 보며/들으며 고향의 아내가 출산하는 모습과 만난다. 다만 가족의 붕괴와 만나는 <희생>은 끝내 아무런 비도 내리지 않는다.
타르코프스키가 <향수> 이후 <햄릿> 을 찍을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이 드라마에서 정신적으로 도덕적인 인간과 그를 둘러싼 저속한 현실 사이에서 부딪히는 영원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관심은 미래의 인간이 과거 속에 묻혀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과거는 가족의 역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 때문에 정신적 원칙을 포기할 것인가 갈등한다. 결국 그는 죽음을 맞고, 거기서 구원을 본다.
타르코프스키의 주인공들은 가족 속에서 역사를 본다. 그 공간과 인물들 사이에는 역사에 대한 팽팽한 긴장이 존재한다. 어떤 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역사로부터 한 번도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희생>에서 그의 주인공은 미래의 역사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리고 이 긴장은 역사와 유토피아 사이의 대결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긴장이 언제나 유토피아의 승리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패배의 형태다. 유난히 그의 영화는 광기의 증후군에 둘러싸여 있다. <안내자>의 안내자는 주변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향수>에서 가족 대신 인류를 구하려는 도메니꼬는 이웃들에게 미친사람으로 불리며, 그가 온천장에 들어가는 것이 거부된다. <희생>에서 생일날 희생하는 알렉산드르는 집을 불태우고(두개의 분신을 연기하는 도메니꼬와 알렉산드르는 모두 동일 인물 에를란드 요셉슨이 맡고 있다)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타르코프스키는 광인들을 통해서 세계가 정신적이라는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들려준다.
그러나 만일 이 모든 고통에 아무런 대가가 없다면 어떻게 희망이 있다고 말할 것인가? 타르코프스키는 이 연약한 인간들을 통해서 삶의 승리라는 주제를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실용주의가 만연된 이 세상에서 자신의 확신에 가득 찬 영혼의 목소리로 대항하는 것, 그래서 인간이 소유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상 깨어 있는 불안한 양심을 끈질기게 끌어낸다. 고통과 광기 속에서의 삶의 승리? 그것을 타르코프스키는 기적으로 보여준다.
<안내자>에서 우리는 예상치 않은 기적과 만난다. 희망의 방에 이르는 그 긴 여행 끝에, 그 문턱에서 보는 안내자와 가족의 화해의 광경이다. 선술집에서 나선 안내자 가족은 불구가 된 딸의 이동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걷지 못하는 이 소녀의 이동에 이상하리만큼 충격을 받는다. 그 무표정함. 기적은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촬영기는 그 이동과 함께 뒤로 물러나고, 우리는 소녀가 아버지인 안내자의 어깨에 앉아 있었음을 보게 된다. 내부적인 도덕의 붕괴 뒤에 잊은 것이 사랑이었음을 이 기적은 보여준다.
<향수>에서의 기적은,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예외적인 원칙의 포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메니꼬가 로마에서 분신하는 동안 고르차코프는 메마른 온천장을 가로질러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옮겨 놓는데 가까스로 성공한다. 이 성공은 그에게 지금 이곳이 고향이라는, 공간의 붕괴 현상을 가져다 준다. 언제나 두개의 화면으로 분할되었던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러시아의 고향이, 거대한 성당속에 그의 고향이 자리하는 장소의 모자이크로 나타난다. 이 마음으로서의 풍경은 두개의 기적을 보여준다. 그 하나는 비가 오는 날 호텔방에서 보았던 실내의 기하학적인 역전이다. 호텔 방에서 그는 왼쪽에 외부로 향하는 창문을, 오른쪽에는 욕실로 들어가는 문을 사이에 두고 침대에 누워 향수에 시달린다. 이 공간이 마지막 장면에서 위와 아래로 뒤바뀐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풍경이 이탈리아 성당인 반면, 그가 앉아 있는 곳은 고향이다. 성당의 원형 창문은 그의 앞에 놓여진 원형 호수와 위와 아래를 구성한다. 두개의 원과 두개의 사각형 사이에서 고르차코프는 내면의 붕괴를 경험한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러시아의 시골농가는 이제 하나의 유기적이고 나누어질 수 없는 전체로 통일된 영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러시아의 고향이 아니며 그 어디도 아닌, 고르차코프에게도 낯설고 새로운 곳이 된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살다가 죽어야 할 것인가? 그 기적 앞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은 비가 아니라 얼어붙은 눈이다.
이제 그의 영화에서 마지막이 된 기적이 <희생>에서 보여진다. 이 영화는 단 하나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희생과 그 보답, 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렉산드르는 희생하고, 해변에 있는 죽은 나무는 다시 살아난다. 이 부활 아래 누워 손자는 처음으로 말을 한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지?"
촬영기는 대지에서 나무를 따라 수평으로 수직 상승한다. 바다가 보이고 그리고 하늘에 이른다. 그의 마지막 촬영기 이동은 이 세상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하나임을 보여주는 기적에는 희생이 따르는 것임을, 묵시록적 비젼을 통해서 타르코프스키는 거듭 우리에게 호소한다. <희생>의 대사처럼 "희생없는 선물이란 무의미한 법이다"
그런데 이 촬영기의 이동은 어디선가 보았던 것이다. 그건 다름아닌 데뷔작 <이반의 소년시절>의 첫 장면에서다. 모든 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화가 자신의 죽음 뒤에 질문되기를 바라고 있다.
(IV)
타르코프스키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사람들은 묵시론적 침묵의 증후군이 임박한 지금 생존의 그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명의 물을 부어 넣은 메마른 나무에 관한 전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수도승은 메마른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언덕에서 산마루까지 한걸음씩 날랐다. 오직 그의 행위가 신에 대한 신념, 그 기적에 대한 믿음 속에서 필연적이라는 생각으로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기적을 보기 위해서 살아간 셈이다. 어느 날 아침 나무는 살아났고, 가지에는 잎사귀가 덮였다. 기적은 분명 진실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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