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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영화제작에 매진해 온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인생은 1950년대에 시작돼 숨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계속됐다. 한국영화사의 산증인 신상옥 감독이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년 전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 통원치료를 받아 온 신상옥 감독은 결국 11일밤 11시 39분 숨을 거뒀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은희씨와 2남2녀가 있다. 1926년 함경북도 청진 출생인 신상옥 감독은 동경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시작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1952년 <악야>로 감독 데뷔한 신상옥은 53년 당대 최고 배우였던 최은희와 결혼해 화제를 낳았다. <악야>에 이어 1950년대 <지옥화><어느 여대생의 고백><동심초> 등 12편의 작품을 내놓은 신상옥 감독은 1961년 부인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이 당시 최고의 감독이었던 홍성기 감독과 배우 김지미 커플의 <춘향전>을 압도하며 대중적인 입지를 다졌다. <로맨스 빠빠>(1960) 신상옥 감독의 전성기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다. 1960년대 34편의 작품을 연출하며 한국형 장르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이뤄내며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열어냈다. 1960년대 신상옥 감독은 서민극 <로맨스 빠빠><로맨스 그레이>, 문예 영화<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상록수>, 시대극 <연산군><이조여인 잔혹사>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한국형 대중 영화를 선보여 왔다. 그의 작품은 미학적인 완성도와 아울러 탁월한 대중적 감각으로 당시 ‘고무신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원동력을 만들어 냈다. 1960년대 초반의 작품들이 대중적 성공을 이루자, 신상옥 감독은 1966년 당시 안양촬영소를 인수한 뒤 ‘신필름’을 만든다. ‘신필름’은 한국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춘 영화사였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영광과 몰락을 함께 해 온 산증인인 ‘신필름’은 총 300여 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한 대규모 스튜디오 시스템을 도입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유신 정권과의 마찰로 1975년 등록이 취소된다. 이때 신필름에서 만들어졌던 작품들은 동남아시아에서도 상영돼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그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벙어리 삼룡이> 등으로 4차례 대종상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4차례에 걸쳐 아시아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78년 부인 최은희씨와 함께 납북된 신상옥 감독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만들어 <소금><돌아오지 않는 밀사><탈출기><불가사리> 등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의 경우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해 국제적 명성을 이어갔다. 고려시대 민담에 기초한 <불가사리>는 2000년 7월 국내 극장에서 북한 영화 최초로 상영돼 화제를 모으기도. 86년 북한을 탈출해 또 한번 세계를 놀래킨 신상옥 감독은 할리우드로 활동 영역을 옮겨 ‘신프로덕션’을 세우고 <닌자 키드> 시리즈물을 내놓으며 영화제작자로 활동을 이어갔다. 89년 5월 귀국한 신상옥 감독은 <마유미>를 연출하며 국내 영화계에 복귀했으며 94년에는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2002년 국내에 영구 귀국한 신상옥 감독은 ‘안양신필름 예술센터’를 설립해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신상옥 감독은 한국영화사의 굴곡과 함께 한 이로 죽기 전까지 영화 제작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으며 한국영화사에서 독보적인 거장으로 우뚝 선 인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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